“제 4장 문화체계로서의 종교” 요약
- 서론
클리퍼드 기어츠는 “문화”를 이렇게 정의한다.
그것은 상징으로 나타나는 역사적으로 전승된 의미의 유형, 즉 인간이 그것을 통하여 생활에 관한 지식과 태도를 서로 전달하고 영속화하고, 발전시키는 상징의 형태로 표현되는 전승된 개념의 체계를 뜻한다.(113)
이 장에서 기어츠는 위와 같은 문화에 대한 이해를 배경으로, 문화체계로서의 종교에 대해 밝혀 적고자 한다. 기어츠가 포착한 문화체계로서의 종교는 아래와 같다.
(1)작용하는 상징의 체계로, (2)인간에게 강력하고 널리 미치며, 오래 지속되는 분위기와 동기를 성립시키고, (3)일반적인 존재의 질서 개념을 형성하며, (4)그러한 개념에 사실성의 층을 씌워, (5)분위기와 동기가 특이하게 현실적인 것으로 보이게 한다.(115)
본론에서 위와 같은 순서로 인류학적으로 문화체계로서의 종교를 바라보는 관점을 보여준다.
2. 본론
(1) 작용하는 상징의 체계
기어츠는 상징에 대해 이렇게 정의한다. “상징은 개념(개념은 상징의 ”의미“를 말한다)을 운반하여 전달하는 모든 종류의 대상물, 행위, 사건, 성질 혹은 관계를 말하며, 이것이 여기서 내가 따를 접근법이다.”(115) 상징의 두드러진 특징은 자기 내부에서 등장하지 않고, 항상 외부로부터 주어진다는 점이다. 기어츠도 지적한 바, “상징체계이건 상징의 복합이건 간에, 문화 패턴에 관한 한, 여기에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반적 특성은 그것이 정보의 외재적 원천이라는 점이다.”(117) 우리의 밖에 외재한 상징의 영역에서 모델이 만들어진다. “즉, 문화 패턴이 ‘모델’이란 일련의 상징들인데, 이 상징들간의 상호 관계”(118)를 통해서 모델이 형성되고 변화한다.
모델은 ‘대한’과 ‘위한’의 의미를 지니는데, “실재”에 대한 모델과 실재를 위한 모델이라는 두 가지이다. “실재”에 대한 모델은 그 실재가 이해 가능하도록 해석한다. 또한 “실재”를 위한 모델은 그 실재의 문화 패턴이 기능하게 한다. 모델은 실재에 대한 해석과 실재를 위한 권위부여 두 가지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 모델이라고 부르는 문화 패턴, 즉 상징들 간의 상호 관계를 맺는 패턴은 실재를 해석하고 실재를 기능하게 하는 실재에 대한, 위한 상징체계로 “상호 치환 가능”하다.(119)
(2) 인간에게 강력하고 널리 미치며, 오래 지속되는 분위기와 동기를 성립시키고,
이에 미루어 볼 때, 종교적 상징과 상징체계 또한 상호 치환 가능하다.(119) 종교적 활동에 관한 한, 두 가지 다소 상이한 종류의 성향이 그것들에 의해서 유발된다. 즉 분위기와 동기이다.(121) 분위기와 동기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동기가 그것이 성취하려고 하는 목적과 연관하여 “의미 있게 되는 것”이라면, 분위기는 그것이 유발되었다고 생각되는 조건과 관련하여 “의미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동기를 그것의 달성이라는 맥락에서 해석하는 반면, 그러나 분위기는 그 근원에 의해서 해석한다.(123) 문화체계로서의 종교에서 이 분위기와 동기가 동시에 작동하고 있다. 기어츠는 이 작동을 당혹, 고통, 악의 문제에 대한 종교적 관점으로 설명한다.
(3) 일반적인 존재의 질서 개념을 형성하며,
인간은 의미를 찾을 수 없는 해석 불가한 문제에 대해서 불가지론을 펼치지 않고, 설명을 하려고 한다. 그에 따라, 우주의 기원과 같은, 신이나 각종 혼돈에 대한 해석과 혼돈을 위한 기능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혼돈을 마주한 인간이 느끼는 것은 일종의 해석의 근거 없음으로부터, 위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모르는 부재로부터 오는 당혹이다. 이 당혹을 견디기 위해서, 나름의 상징체계로 해석하고 부재한 대상을 실재하는 사물을 상징화하여 “믿는다.” 당혹은 자연히 고통이 주어질 때, 고통이 주는 당혹감을, 그 고통에 대한 해석과 고통을 위한 해석으로 수용한다.
종교적 문제로서 고통의 문제는 어떻게 고통을 회피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고통을 당하느냐, 어떻게 육체적 고통, 개인적 상실, 세속적 패배, 또는 타인의 고뇌를 무기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을 참을 만하고, 견딜 만한 것(우리가 흔히 말하는 고통당할 만한 것)으로 만드느냐이다.(131)
고통의 문제는 쉽게 악의 문제로 넘어간다.(133) 악의 문제는, 또는 아마도 악에 관한 문제라고 해야겠지만, 본질적으로 당혹 또는 당혹에 관한 문제나 고통 또는 고통에 관한 문제와 동일한 종류에 속한다. 무지함으로부터 기인한 당혹, 부지불식간에 초래된 고통, 불의한 악에 대해 종교적 관점은 “불합리성이 세계 전체의 특징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문제이다.(137)
(4) 그러한 개념에 사실성의 층을 씌워,
여기에서 기어츠는 문화체계로서의 종교에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게 한다. 그것은 “어떻게 이러한 부정을 믿게 되는가”이다. 어떻게 종교적인 사람이 불편한 마음으로 경험 세계의 무질서를 인지하는 것으로부터 근본적인 질서에 대한 어느 정도 안정된 확신으로 넘어갈 수 잇는가의 문제이다. 안정된 확신은 “신앙”인데, 신앙은 종교의 맥락에서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137)
기어츠는 그것을 “정말로 정말”이라고 말한다. 특정한 상징의 복합에 설득력이 있는 권위를 불어넣는 것이다. 그 권위는 분석적 관점에서 볼 때 종교활동의 본질이다.(141) 의례는 종교적 개념이 진실이며, 종교적 지시가 옳은 것이라는 확신이 어떤 식으로든 발생하게 한다. 의례(즉 신성화된 행위)에 의해 종교의 권위는 불어넣어 진다.(141) 왜냐하면 이 의례의 참여자들에게는 의례행위가 종교적 관점의 설정, 구체화, 실현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믿는 것에 관한 모델일 뿐 아니라 그것을 믿는 것을 위한 모델이다. 이러한 유연한 연극(의례) 속에서 사람들은 그것을 그려냄에 의해서 그들의 신앙을 얻는다.(143)
(5) 분위기와 동기가 특이하게 현실적인 것으로 보이게 한다.
그러나 누구도, 심지어 성인조차도, 항상 종교적 상징이 공식화되는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순간적으로만 거기에서 산다.(149) 종교적 개념이 정의하는 의미의 준거틀로 의례를 통하여 “도약한” 뒤에, 의례가 끝나고, 상식적인 세계로 다시 돌아오면, 인간은 변한다. 그리고 그가 변한 것처럼, 상식의 세계도 변한다. 이제 상식의 세계는 그것을 수정하고 완성시키는, 보다 넓은 실재의 부분적 형태로만 보이기 때문이다.
3. 결론
인류학자에게 종교의 중요성은 그것이 개인이나 집단에게, 한편으로는 세계, 자아 및 그 양자간의 관계에 대해서 일반적이고 명확한 개념의 원천(어떤 것에 대한 모델)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뿌리 깊으며 마찬가지로 명확한 “정신적” 성향의 원천(어떤 것을 위한 모델)으로 작용할 수 있는 능력에 있다. 이러한 문화적 기능에서부터 차례대로 종교의 사회적 심리적 기능으로 흘러간다.(154)
따라서 종교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는 두 단계의 작업이다. 첫째, 종교의 핵심을 구성하는 상징에 구현되어 있는 의미체계의 분석이며, 둘째, 이러한 체계를 사회-구조적, 심리적 과정에 연결시키는 것이다. 기어츠가 그 당시 사회인류학적 작업에 불만스러워한 까닭은 첫 번째 단계의 분석을 무시하고 가장 규명해야할 것에 대해서 “이미 주어져 있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 있었다.(156) 기어츠에게 있어서 종교는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상징들의 복합적인 상호작용이 빗어낸 실재에 대한 해석/실재를 위한 기능으로 작용하는 상징의 체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