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그리스인, 유대인, 그레꼬 로만 유대인의 관점 비교
- 그리스인 중 소피스트들의 관점
인간이 사회적 책임을 지니는 까닭은 무엇일까? 타인과 호혜적 관계를 구축함으로써 다양한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일종의 자기의 이익을 위한 질서 만들기가 아닐까? 그것이 개인이 지켜야만 하는 선함, 혹은 정의로 포장하고 있는 것 아닐까. 이 논지는 그리스인들 중, 자기의 이익을 위해 승리하는 논쟁을 가르쳤던 소피스트들의 정의(正義)에 대한 정의(定意)와 유사하다. 트라쉬마코스는 정의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정의가 강자에게 유익한 것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아니라고 주장하오!”(플라톤 <국가> 1: 338c)
정의는 일종의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프로파간다로 기능한다는 뜻이다. 프로파간다는 익히 아는 바대로, 강자나 혹은 통치하는 자가 다수의 대중들에게 특정한 사회적 태도에 영향을 미치게 하는 기능을 수행함 혹은 그 이론을 지칭한다. 정의로움, 선함 등은 강자가 자신의 위치를 지켜가기 위한, 혹은 자신의 이익을 견고히 다지기 위한 프로파간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소피스트들의 생각이었다. 여기에서 정의가 강자의 유익함을 위한 수단으로 기능한다는 것은 약자에게 정의를 강제하는 국가의 위정자들이 그 이익의 최대 수혜자라는 말이 된다. 국내 정치의 안정화는 곧, 질서를 지키는 시민들을 의미하고, 외적으로부터 단결된 힘으로 지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많은 재산을 가진 이가 사회질서를 요구하는 까닭은 그가 가진 재산을 사회질서가 문란해짐으로 인해서 탈취당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있다.
이 시점에서 의문점은 약자 또한 정의를 구한다는 것이다. 소피스트들은 강자들만이 정의를 구한다고 하지만 약자들 또한 국가의 정의를 구한다. 이미 가지고 있는 권리들만이라도 지켜서 삶을 영위해야 하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사태에서도 국가 구성원들의 대다수가 외출을 조심하고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했던 것은 타인을 위한 행위인 동시에 자신을 위한 행동이다. 이 행동으로 인해서, 국가 권력자는 국가의 위기를 탈피하는 이익, 타인은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리지 않을 수 있는 이익, 자신은 코로나 바이러스에 안 걸리고 동시에 타인에게 전파했다는 오명을 쓰지 않을 이익을 얻는 것이다. 정의가 일종의 프로파간다이자, 국가질서라면 공공의 이익을 대변하기도 하는 것이다. 정의라는 사회적 책임을 지는 일은 단순히 강자와 약자의 이분된 구조에서만 기능하지 않고, 오히려 소피스트의 관점으로도 약자에게 충분히 이익을 가져다준다.
2. 그리스인 중 소크라테스의 관점
소크라테스도 정의를 이익의 관점으로 시작한다. 그에게 있어 정의란 이러하다. “간단히 말해, 진실을 말하는 것이라고, 누구한테서 무엇을 빌렸건 빌린 것을 돌려주는 것이라고 말해도 될까요?”(플라톤 <국가> 1:331c) 소크라테스의 정의는 황금률이다. 주면 다시 돌려주고, 돌려받았으면 다른 것을 주는 개인들간의 상호 호혜적 관계가 확장되어 전 국가적인 질서로 확장되는 것, 혹은 그 반대로 국가의 질서가 상호 호혜적인 정의를 추구하여 그 국가 안에 속한 국민들의 행복을 추구하게 하는 것이 바로 정의다.
그 구성원인 통치자, 수호자, 일반 시민은 자기의 질서를 지켜야만 한다. 통치자는 지혜(국가운영에 관한 전문지식)를, 수호자는 용기(소신의 보존)를, 일반 시민은 절제(개인의 욕구보다 국가의 통치에 따름)를 가져야 한다. 이 셋이 적절한 조율을 이루어가는 것이 정의로운 국가이다. 이 중에서 일반 시민의 절제를 소피스트들은 약자들에게 강자가 강제하는 정의로 보고 비판하였던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인 트라쉬마코스와 대화할 수 없다고 했으나 트라쉬마코스가 말한 부분에 대해서 소크라테스는 직접적인 해명을 했어야 한다. 다만, 그가 대화를 이어가지 않았던 까닭은 그가 가진 이상론과 소피스트의 현실주의가 맞닿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에게 정의는 아레테의 상태에 놓여있는, 한마디로 진리를 찾은 자, 진리로 사는 자에게서 발현되는 것이다. 유명한 동굴의 일화처럼 비춰진 상에 불과한 세계의 정의(소피스트 식의 현실적인 정의)만 볼 것이 아니라, 진리에 속해 있는 눈부신 정의를 보고, 그 진리를 비춰진 상이 전부인 사람들에게 “진실로” 전하는 의무를 수행해야만 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 정의가 진실을 전하는 것인 이유가 이 지점에 있다. 정의는 사람들이 보지 않으려 하는, 보기 불편해 하는 진실을 전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산파술’은 끝없이 비춰진 상에 관한 논의들을 소거해나가고 결국에 진리를 깨달아가는 수순을 추구했던 것이다. 정의로운 삶, 사회적 책임을 지는 삶, 진리를 전하는 삶을 살아야만 한다는 진실을 전했다.
3. 그레코-로만이자 유대인인 바울의 관점
BC 140- AD300년경, 그리스 문화와 로마 문화가 융합되면서 로마로 그 주도권이 넘어가는 시대에 바울은 경계인으로 태어났다. 로마 시민권자이자 유대인 중의 유대인인 랍비로 성장한 그는 기독교 초기에는 이단으로 그들을 정죄하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충실한 사도가 되어 로마에서 죽을 때까지 복음을 전했다. 그의 일대기는 소크라테스의 일대기와 매우 흡사한데, 자기가 믿는 진실을 전하는 것에 목숨을 걸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대중들에게 진리를 전하는 것을, 바울은 진리인 복음을 전하는 것에 목숨을 걸었다.
다만, 유대인인 바울과 소크라테스의 진리는 차이는 있었다. 바울의 진리는 국가를 초월하는 것이었던 반면, 소크라테스의 진리는 국가를 초월한 것이었으나 실제 국가 안에서 기능해야만 하는 질서였다. 소피스트들의 진리는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프로파간다의 생성이었다. 바울이 소크라테스와 진리에 관해서 공유하고 있는 관점은 두 구절을 비교하면 추출된다.
마지막에 온 자라도 현명하게 선택하고 진지하게 살아간다면 결코 나쁘지 않은 바람직한 삶이 마련되어 있다. 맨 먼저 선택하는 자는 방심하지 말고, (플라톤 <국가> 10:619b)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이 둘이 공유하고 있던 관점은 개인의 정의, 사회적 책임, 선함을 추구함은 마땅히 저 피안의 진리이자 곧 이 땅에 실현되어야만 하는 진리이며 그것을 선택하고 전해야만 하는 사명이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저승에 간 사람의 일화를 이야기하며 이승에서 바람직한 삶을 먼저 선택하는 자에게 방심하지 말라고 말한다. 바울 또한 선줄로 생각한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말한다. 진리의 길은 어느 특정한 한 순간의 깨달음이라기보다는 끝없는 책임을 지며 삶을 살아가는 일이기 때문에 항상 그 진리를 저버릴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뜻이다. 그것이 이데아의 태양을 본 것과 같은 진리에의 추구이냐, 하나님의 율법의 아들로서의(바르 미쯔바) 삶이냐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정의, 사회적 책임, 진리, 복음, 아레테, 로고스, 사랑 등등의 말로 다르게 불리나 그 길이 추구하는 바는 평화가 온 땅에 편만함 즉, 지고의 행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