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도입
영화 카핑 베토벤의 구조가 흥미롭다. 영화의 시작과 끝이 베토벤의 죽음(끝) 장면으로 이어져 있다. 보통의 일반적인 형식을 따르는 영화라면 주인공이 죽는 장면으로 영화를 시작하지 않는다. 주인공의 죽음이 극을 이끌어가는 동력의 상실을 의미하고, 따라서 영화에 대한 관객의 몰입이 상실될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형식을 벗어난 영화감독의 장면 배치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다. 왜 베토벤의 죽음이 영화의 시작인가? 그 답은 베토벤이 작곡한 대 푸가의 현악4중주의 흐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 푸가의 마지막 악장이 다시 첫 번째 악장과 같이 또 다시 도입부로 시작하는 느낌을 주는 것과 영화의 구조가 닮아있다. 시작과 끝이 같은 듯 다르게 생성되면서 그 애매한 연결이 일정한 형식을 가지고 있는 영화와 다르게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 불편함이 카핑 베토벤 영화를 관통하고 있고, 이전에 불편하지 않게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에 질문을 제기할 준비를 하게 했다. 바흐친 세미나의 시작에 카핑 베토벤이 배치된 의미는 무엇일까. 직관적으로 카핑(copying)이 베토벤, 바흐친, 신학을 꿰뚫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2. 카핑 베토벤, 바흐친, 신학
작중에 안나 홀츠의 일은 단순히 베토벤의 악보를 베끼는 작업이 아니었다. 베토벤이 자신의 의도와 다른 실수를 악보에 그렸을 때, 안나는 그 악보를 수정했다. 베토벤의 의도와는 다른 실수라 여기고 고쳤다(Corrected)고 말한다. 베토벤의 곡 흐름으로 볼 때, 고치는 편이 맞다며, 작품에 참여한 것이다. 이를 베토벤은 기이하게 생각했다. 또한 베토벤이 귀가 멀어서 교향곡 9번의 지휘를 할 수 없을 때, 베토벤이 안나의 지휘를 따라 지휘했다. 이 또한 안나의 지휘를 온전히 따라하기만 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교향곡 9번의 클라이막스 장면에서 베토벤은 두 눈을 감고 지휘를 하게 되었으므로. 이러한 장면들의 배치와 그에 대한 카핑의 해석이 양방향적이고, 둘 사이에 새로운 해석이 생성되는 것은 모방이나 베끼기보다 대화와 그 성질이 비슷했다. 상대방의 말을 온전히 따라하지도, 그렇다고 그 대화의 흐름을 벗어나지도 않는 대화의 성질과 닮았다고 느꼈다. 그래서 교향곡 9번의 공연은 안나와 베토벤의 대화로 생성되어 누구의 소유가 될 수 없었다. 베토벤이 공연 후에 “안나 홀츠, 우리가 해냈어!”라고 외친 까닭은 서로의 사이에 교향곡 9번이 새롭게 생성되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해낸 것도, 네가 해낸 것도 아니라 ‘우리’가 해낸 사건이 되었다.
이 성공 이후로 베토벤은 교향곡 9번의 성공 이후로 대 푸가의 작곡에 몰두한다. 베토벤이 산책하며 듣는 시냇물 소리, 바람 소리가 푸가의 음악과 겹쳐 배치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푸가는 자연의 카피였다. 그리고 자연은 신의 카피이다. 이렇게 생성되고 소멸하며 닮아가는 푸가로 베토벤은 “신의 언어”를 카피하여 표현한다. 안나는 푸가의 악보를 베껴 그리다가 이런 질문을 한다. “악장이 어디에서 끝나는가요?” 물으니 베토벤은 끝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전에 베토벤이 했던 음악과 또 다른, 형식이 완전히 달랐기에 안나는 질문을 제기했던 것이다. 베토벤은 이 질문에 사람들은 올바른 형식이란 것에 얽매여서 시작과 끝을 규정하려 하지만 음악이란 살아있는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유기체와 같다고 말한다. 안나는 베토벤과 같이 교향곡 9번의 생성을 경험해보았으므로 더 이상의 말을 하지 않고 묵묵히 푸가를 옮겨 적는다. 그리고 교향곡 9번의 성공 이후에 사람들은 기대에 차서 현악4중주를 듣기 위해 모여든다.
교향곡에 전율을 일으키던 사람들이 대 푸가를 견디다가 실망하고 돌아서는 장면이 나온다. 안나는 베토벤에게 당신이 자연에서 들었던 신의 음성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런 식으로 들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안나 또한 대 푸가는 해석이 난해하고, 베토벤의 귀가 멀어서 만들어진 괴작으로 본 것이다. 안나의 말에 베토벤은 환영받지 않을 줄 알았다고 담담히 이야기한다. 클래식 역사에 따르면, 베토벤은 그의 대 푸가가 사람들에게 혹평을 받는 것에 매우 분개했다고도 전해진다. 최고의 작품을 들을 줄 모른다며 화를 냈다고 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대 푸가가 깔리면서 안나가 베토벤이 죽고 난 뒤에 풀들이 나부끼는 들판을 가르며 걷는다. 안나는 베토벤의 푸가가 어떤 것을 카피했는지 깨닫는다. 그것은 자연, 신이 인간에게 보여주고, 맡게 하고, 듣게 하고, 총체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언어였다. 베토벤이 안나의 애인의 다리모형을 부수면서 “이것은 단순히 땅과 땅만을 연결하지만, 나는 영혼과 영혼을 연결한다”고 고함친 것과 의미가 통한다. 언어란 사람을 연결시키는 다리이고, 베토벤에게 있어서 음악은 신의 언어였다.
베토벤의 귀가 멀도록 고함치는 신은 자연으로, 베토벤은 그 자연을 음악으로, 안나는 또 다시 베토벤의 대 푸가로 자연의 소리를 듣는다. 이 연쇄적인 카피의 고리는 끊어지지 않고, 즉, 종결되지 않는 흐름이며 그 끝나지 않는 흐름은 바흐친이 말한 대화의 특성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꼬리를 물자, 바흐친과 베토벤(영화감독의 의도가 다분히 들어간 작중 인물로서)이 신학이 추구할 방향이 카피이자 대화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바흐친은 대화가 종결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녹음기를 켜놓은 것과 같이 똑같은 음성을 서로 주고받을 때에라도 그것은 이미 반복이 불가능해진다. 매번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서 같은 말도 다른 의미로 읽히기 때문이고, 타인과 나 사이에서 새로운 의미가 생성되기 때문이다. 만약 작가가 글로 쓴 작품이 결말이 났더라도 작가와 독자 사이에 그에 대한 해석, 번역, 읽기, 억양, 상황, 시대 등등의 모든 것이 달라지기에 종결 불가능한 대화는 계속 생성된다.
이러한 카피의 종결되지 않는 생성, 대화의 종결 불가능성에 미루어 볼 때 신학무용론에 빠졌던 나를 돌아볼 계기가 되었다. 때때로 나 자신이 하고 있는 신학이 삶, 즉, 시간과 공간에 적절하게 녹아들지 못하는 학문을 위한 학문과 같이 느껴졌다. 새롭게 생성되는 것은 없고, 과거의 형식에만 얽매이는 그런 학문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베토벤과 바흐친의 카피와 대화의 연장선에서 신학에 대한 나의 관점을 바꿔보았다.
신학이 언어라면 “연결하는 역할”로 기능해야만 한다. 타인과 타인, 나와 타인, 신과 나 사이를 어떻게 현실에서 연결할 것인가. 종결되지 않은 채, 수천년을 생성하고 소멸하는 수많은 신학들 속에서 내가 말하는 신학은 어떠해야 할까. 베토벤은 영혼과 영혼을 잇는 것이 자신의 음악이라고 하였고, 바흐친은 나와 타인 사이의 대화로 결코 종결되지 않고 종결시킬 수 없는 삶을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나의 신학은 어떻게 신의 언어를 번역하여 타인과 타인을 연결하는 다리역할을 할 것인가. 그것은 아마 고상하고, 형식적인 작업은 아님이 분명하다. 머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보이지 않는 저 어딘가, 뜬구름 잡는 영혼도 아니고 이 땅 위의 몸으로 하는 일일 것이다.
인간의 창자가 신께 가는 길이다.
신은 머리도, 영혼도 아니고 여기, 이 창자에 산다. _베토벤의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