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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논문

by 스파르탄 2024. 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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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근래 새삼 진지하게 논문을 기획하고 쓰고 있다. 지난 몇주간 논문의 뼈대라 할 수 있는 목차를 머리인 주제 아래 얹는 작업을 진행중이다. 폭풍우치는 허허망망대해에서 배의 키가 살짝만 각도를 틀어도 목적지는 전혀 달라지듯이, 주제의 단어 하나만 수정해도 목차는 내 척추같이 이리 흔들, 저리 흔들이다. 유재하 시인의 이리갈까, 저리갈까 하는 생각이 덩굴식물의 뿌리처럼 이리저리 뒤엉키다보면 그 유연했던 가닥들이 서로를 감싸서 단단해져간다. 디스크로 고장난 척추에 철심을 하나씩 박아넣어 조이듯 유연했던 사고가 점차 완고하게 세워지는 느낌이 든다. 

 

  실제로 말이란 유연하고 애매하나, 말이 글이 된다면 이 시대에는 이 시대와 불화하여 돌을 맞고, 다음 세대에는 그 시대와 맞지않아 돌을 맞기 마련이다. 고전은 이 돌을 맞고도 재해석될 명반들일테고, 사실 내 논문은 그 정도의 명반이 되길 바라지 않고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에베레스트의 산소농도만큼이나. 다만, 바라기는 내가 쓰는 이 논문이 훠궈를 끓이다 못해 달여진 육수에 낀 기름을 찬 얼음이 든 국자로 걷어내는 역할로 기능하길 바랄 뿐이다. 너무나 오랜 시간을 들여서 끓여진 학문에 둥둥 떠있는 기름막을 몇 국자 걷어내는 아주 찬 국자. 또 그러다가 어느 새 방심할라치면 국자 안으로 기름이 들어와 울컥울컥 그 얼음이 녹아 소임을 다하는 것처럼, 그 기름에 나도 절여져버리면 그만이다. 나도 끓여진 기름이 되었을때, 나를 걷어내줄 구원자가 반드시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또, 운이 좋으면 내 논문책이 누군가의 라면냄비받침으로 바쳐지고, 냄비모양으로 동그랗게 타버린 흔적으로 남아도 감사할 일이다. 식탁을 태우지 않고, 대신 탔다는 것, 그 작은 숭고함에 잘했다라는 긍정의 동그라미까지 부여된다면 만족이다.

 

  11학기에 들어서니 실리로 기울었던 맘이 논문을 제대로 내 속의 알맹이를 목판삼아 그대로 찍어내자는 맘으로 기울었다. 이 논문을 발판으로 여기 기웃, 저기 기웃하여 한 자리를 어떻게 하면 제대로 꿰어내볼까.. 하는 심상은 애써 내치려고 하지 않아도 온데간데 없고 어떻게 하면 내 속의 감정을 논리의 옷을 입혀 런웨이를 걸어보게 할까를 고민하는 자신을 관망한다. 이리저리 기웃거리고, 이곳저곳을 파고, 여기저기로 다니며 길을 내던 혼란한 시절을 지나 이제 논문으로 꿰어보려고 하지 않아도 스스로 진주알들이 굴러들어와 명주실에 꿰어지는 경험을 한다. 이곳저곳을 진득하지 않게 파뒀던 곳에서 물이 솟고, 우물이 되고, 그 우물들이 같은 지하수를 원천으로 삼고 있음을 깨닫는다. 여기저기 두서없이, 정처없이 올랐던 길들의 끝이 이어져 산 정상에서 이어지고 있었다.

 

  논문을 연금하는 과정에서 나름의 충실함과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 뇌가 일을 하고, 손이 바쁘다. 저녁에 아이들과 함께 누우면 무엇보다 손과 머리가 뻐근한 피로가 좋다. 누군가에게는 쓸데없는 일이 나에게도 사실 쓸데가 보이지는 않는다. 세상에 쓸데만을 생각해서 하는 일이 대부분이라면, 가끔 쓸데없이, 핀트가 어긋나서 더 쓸데없어지더라도 가보는 인간이 몇명쯤은 있어도 될 것 같다. 하지만 벌써 내 논문은 지인들의 냄비받침으로 쓸 곳이 몇 곳은 예정되어 있으니 안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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