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신의 죽음과 이 종교의 나아갈 방향에 관한 대화
-리차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 4장, 5장, 6장을 중심으로-
1. 들어가며
존 레논이 1971년에 냈던 솔로 앨범에 수록된 “Imagine”은 아름다운 멜로디와 상반되는 시대에 대한 명확한 비판의 메시지와 평화를 향한 희망이 공존하는 곡이다. 특히, 천국과 지옥이 없는 세상, 종교마저도 없는 세상을 상상해보라는 내용은 종교가 가지고 있는 해악성을 비판하고 있다. 몇몇의 기독교인들이 이 곡을 부를 때, 종교가 없는 상상이 아니라, “단 하나의 종교”(only one religion)으로 개사해서 불렀다. 존 레논이 상상하는 세계에서 종교가 있어서는 세계가 하나가 될 수 없고, 종교는 없어져야만 하는 것일까? 존 레논이 문학적인 표현으로 종교의 해악성을 비판했다면, 리차드 도킨스(Ricard Dawkins)는 ‘신은 망상’이라는 급진적인 표현으로 과학적 무신론으로 종교를 비판한다. 신이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 그의 사명의 끝이 아니라, 신의 부재를 증명한 이후에 그의 궁극적인 목적은 해악을 끼치는 종교의 기원과 현상을 비판하고, 존 레논이 말한 하나의 평화로운 세계를 지향할 도덕의 기원도 종교와 분리해내려는 시도를 그의 책, 『만들어진 신(God Delusion』에서 하고 있다.
특히, 4장에서 도킨스는 자신의 책의 핵심 주장과 근거가 들어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가 하고 있는 종교 기원과 현상을 비판하는 5장과 도덕의 기원이 종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6장에 앞서서 4장에서 신이 망상임을 지적 설계론자들의 설계를 자연선택과 진화로 반박하는 핵심의 장이다. 신의 부재를 논증하는 기초를 다지고, 종교의 기초인 신의 부재를 주장함으로 종교의 근간을 흔드는 글쓰기를 보여준다. 이러한 도킨스의 신 부재 논증의 내용을 본 발제 2장에서 상세히 요약하고 기술한 뒤에, 3장에서 밈 이론에 기반한 종교의 기원, 종교 현상에 대한 도킨스의 비판을 요약하고자 한다. 특히, 3장의 마지막 부분에는 도킨스의 논증에 반대하는 대표적 학자인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Edgar Mcgrath)의 논박을 균형 있게 제시하고자 한다. 마지막 5장에서는 성공회대학교 교수인 김기석의 종교가 나아가야할 방향성을 마지막에 제시하며 발제를 마치고자 한다.
2. 생물학적 신 부재 논증
도킨스의 신 부재 논증하는 방식은 신존재를 옹호하는 창조론자들의 지적 설계 이론을 반박하는 방식이다. 어떻게 존재하느냐 먼저, 도킨스는 창조론자들이 신의 존재를 옹호하는 대표적인 논증방식을 비개연성(improbalbility)으로 본다. 비개연성이라는 개념은 ‘일어날 것 같지 않은’(not likely to be true or to happen) 일은 일어나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그 외에 일어날 만한 것을 상정하여 논증함을 의미한다. 도킨스는 이 비개연성 논증을 창조론자들이 이용하며 무신론을 반박하고 있지만, 자신이 보기에 오히려 신이 논박당할 것이라고 자신한다.
신이 없다면 인간과 같은, 혹은 다른 생물들의 출현과 행성, 우주의 탄생원리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증에서 먼저 도킨스가 제거하고자 하는 것은 우연의 반대가 신의 설계라는 논리다. 도킨스는 세계가 우연을 통해 출현한다는 것과 계획적인 설계 없이 출현하다는 것이 곧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이 잘못된 생각이라 말한다. 다윈주의를 각성제 삼아서 복잡하게 만들어진 생물이 우연으로 만들어질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신의 설계가 정설이라는 믿음을 반박한다.
기존의 고정된 우연이 아니면 설계라는 식의 논리에 ‘왜?’라는 사회통념을 부수는 페미니즘의 기법을 빌려온다고 말한다. 이러한 페미니즘의 사회 통념을 깨는 기법으로 기존의 생명 이론에서 드러나는 문제인 생물의 비개연성에 대한 설계와 우연의 논리에서 벗어나 자연선택이 비개연성의 지금까지 밝혀진 유일한 해답임을 주장한다. 이 주장의 근거는 창조론의 논리는 ‘일부 자연 현상은 우연을 통해 존재하기에는 통계적으로 너무나 가능성이 희박하고, 복잡하고, 아름답고, 경이롭다. 그렇기에 우연의 대안은 설계 외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잘못된(도킨스의 관점 하에서) 우연을 포기하고 설계를 택할 경우에 설계 또한 ’설계자를 설계한 것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봉착하게 됨을 지적한다.
물론, 지적 설계의 입장을 가진 기독교인들은 이 문제에 해답을 가지고 있다. 성경에서 생명의 창조자인 신은 ’스스로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출애굽기 3장 15절) 3장에서 더욱 자세히 논의하겠지만, 도킨스는 종교의 성서가 도덕의 기원이기에는 일관성이 없음을 지적한다. 따라서 도킨스에게는 성경의 텍스트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식의 논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또한 도킨스는 지적 설계론자들은 생물학적인 환경 적응이 ‘모 아니면 도’의 오류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며 이 오류는 마이클 베히(Michal J. Behe)가 창안한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irrenducible complexity)으로 이어진다. 이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은 지적 설계자들이 자주 언급하는 주장이다. 생물학적 시스템은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복잡한 기관이나 생물로 덜 복잡한 조상에게서 자연 선택을 통해 진화했다고 볼 수 없다는 개념이다. 예를 들어, 눈은 너무나 복잡한 기관이기 때문에 보든지 못 보든지 둘 중에 하나의 상태에 머무르며, 날개도 날든지 못 날든지 둘 중의 하나이지, 중간 단계가 있을 수는 없다는 뜻이다.
도킨스는 생명체의 발생이나 그 기관들이, 혹은 그 무엇이 환원 불가능하게 복잡하기 때문에 설계되었다고 믿는 것은 무지함에 기반한 논증이기 때문에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과학자의 입장에서 그러한 무지에 기반한 ‘교조적인 확신’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종교와 과학이 다른 점을 도킨스는 신비주의자들은 수수께끼에 기뻐하며 그 것이 신비로 남아있기를 바라지만 과학자들은 다른 이유로 수수께끼에 기뻐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신비주의자들은 무지를 신비로 보고 기뻐하지만 과학자들은 무지를 밝히는 즐거움으로 바라본다. 과학이 밝혀내지 못하는 신비가 있다는 환원 불가능성에 기대는 논증방식은 결국, 현재의 ‘무지’만을 근거로 들기 때문에 도킨스는 ‘비과학적’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입장 차가 발생하는 이유는 복잡하고 더 뛰어난 존재가 덜 복잡하고 덜 뛰어난 존재를 만든다는 신앙과 단순한 존재가 진화로 복잡하게 진화해 간다는 과학적 사고방식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신비주의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무지의 틈새를 신비로 채우려고 한다. 도킨스는 무지의 틈새를 생명의 진화적 관점에서 다윈의 자연선택이 훌륭히 논증하고 있는 단 하나의 이론이라고 반박하지만 틈새 신학자들은 생명의 기원에 대한 해답은 신의 설계밖에 없다고 한다. 생명이 나타나는 행성, 우주는 누가 설계한 것이라는 말인가? 신비주의자들은 이러한 행성과 우주로 확대되는 설계이론을 반박하기 위해서 ‘인본원리’ 개념을 가져온다. 행성과 우주에서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인 골디락스 영역(Goldilocks zone)에 있는 것이 과연 신의 세밀한 설계가 아니고서는 이뤄질 수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도킨스는 설계를 인본원리가 뒷받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설계를 대체하는 개념임을 말한다. 수없이 많은 행성 중에 지구에서 인간이 탄생할 수 있는 행성이라고 하더라도 그 것은 일회적인 행운이며 다중우주나 수많은 행성들 중에 골디락스의 영역에 들어서 생명이 시작하기만 한다면 그 이후로는 자연선택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도킨스는 그래서 생명의 기원은 인본원리로, 생명의 진화는 자연선택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생명의 기원은 유일회적인 행운이며 그 이후의 생명의 진화는 자연선택의 누적으로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도킨스는 생명 기원과 행성, 우주의 기원에 대해서 다중우주론의 확률적 통계에서 일어날 법한 일이므로, 그 과정 하에서 신의 존재는 불필요하다. 또한, 이러한 자신의 논증에 대해서 대응논리가 제시되지 않고 있으므로 아직까지 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고 서술한다.
도킨스는 이렇듯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이 확실한 상태로 종교의 신을 몰아간다. 신에 대한 망상을 포기한 뒤에 종교는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지니고 있는가?를 묻는다. 이미 자신이 논박했다고 하는 신을 따르는 종교는 옳은가? 혹은 종교가 어떤 문화에도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한다. 도킨스는 종교인들이 ‘신’의 뜻을 따라 산다는 것이 신이 제거되었을 때에도 종교에는 문화적 가치가 있지 않은가? 라는 질문으로 더 이상 신에 대한 논증에서 벗어나서 실제적인 삶의 문제로, 종교인들을 이끈다. 형이상학적인 신과 관련하지 않고 종교가 가지고 있는 이로운 점은 무엇인가?하며 논의가 종교의 기원으로 이동한다.
3. 종교의 기원, 현상, 도덕 비판과 그에 대한 반증
도킨스는 신이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다윈의 진화를 적용하여 설계 대신에 자연선택이 유일한 대안 이론임을 앞 장에서 논증했다. 뒤이어 도킨스는 신을 따르는 종교 또한 다윈주의를 비켜갈 수 없음을 주장한다. 다윈주의라는 틀로 충분히 종교의 기원을 신을 중심에 두지 않고 해석하려고 시도한다. 도킨스는 다윈주의를 종교의 기원과 현상, 도덕의 기원에 이르기까지 해석하는 틀로 확대하여 이용하려 한다. 물리학에서 모든 이론을 아우를 수 있는 통일이론을 발견하려는 듯이, 도킨스는 다윈주의의 틀로 종교를 바라본다.
도킨스는 현재의 종교를 생존에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 부산물로 규정한다. 그 이유는 과거의 생존을 위한 표현형이었던 수많은 종교 행위들은 종교적 헌신, 순교, 성전(지하드), 금욕, 고행 등은 생존에 과거에는 어떠한 이점이 있었기 때문에 종교가 존속되어 왔다고 본다. 그러나 현재에는 이야기가 다르다. 도킨스가 종교가 부산물인 이유는 현재에는 말 그대로 적자생존의 자연선택의 논리 하에서 도태되는 중이기 때문이다. 도킨스는 종교를 생존 활동의 부산물이다. 도킨스는 ‘나방의 경험법칙’을 예로 들어, 종교가 과거에는 생존에 이점을 주었던 것을 인정하지만, 달라진 상황 하에서는 ‘부산물’로 남았다고 본다. 종교를 생존에 이점을 주었던 부산물로 규정한 뒤, 도킨스는 종교의 심리적 기원으로 자리를 옮긴다. 폴 블룸(Paul Bloom)이 어린 아이들이 가진 이원론적 성향을 가지고 있음을 그 근거로 든다. 천성적으로 뇌에 발현되는 이원론과 목적론이 종교를 지향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제 도킨스는 자연선택으로 설명하는 방식에 착안하여 더욱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관점에도 적용할 수 있는 개념을 탄생시킨다. 자신이 1976년에 『이기적 유전자』에서 유전자의 유비로 탄생시킨 문화복합체 밈(meme) 이론으로 종교를 설명한다. 밈으로서의 종교는 ‘변이가 발생하고 밈풀에서 경쟁하며 자연선택을 통하여 살아남아서 현재에 종교들이 생존경쟁에서 이긴 종들로 본다. 이러한 관점은 물론, 유전자가 자신의 유전자풀에서 생존경쟁을 벌이고 살아남는 것에서 착안한 것이다.
도킨스는 유전자와 구조적으로 유사한 밈으로 내세관, 맹목성, 신비라는 종교적 밈의 목록을 차례로 열거한 뒤에 절대적으로 살아남을 만한 생존가를 지닌 보편적인 밈복합체와 상대적으로 현대 이후로 도태될만한 생존가를 가진 대체가능한 밈복합체를 구분한다. 문화적 현상으로서 종교는 빗나간 부산물과 빗나가지 않은 밈복합체로 나뉜다. 여기에서 빗나갔다는 것은 생존 방식이었던 의식이 시대가 바뀌고 문화가 진화하는 상황 하에서 생존에 적합한 방식이 아니게 되었다는 말이다. 도킨스는 생존에 적합하지 않은 부산물들은 도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가 무신론이자 무종교론자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도킨스의 종교기원의 문제에서 종교현상에 대한 비판에도 접근한다. 어느 시기에는 생존에 적합했던 종교적 의식과 교리들이 점점 빗나간 심리적 부산물인 까닭에 종교적인 행위가 현대에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폭력이고, 그 폭력의 배후에는 대부분이 종교가 있다고 말한다. 특히, 도킨스는 성경의 인물과 사례들은 역할 모델로서 현대인들에게 불쾌한 도덕체계를 느끼게 한다고 주장한다. 성서는 일관된 도덕 체계라기보다 여러 가지가 뒤섞인 것이기에 성서를 도덕의 근간으로 삼는 것은 심각한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도킨스는 도덕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예수는 구약의 신을 능가하고 있다고 인정하지만, 신약의 원죄와 속죄교리는 현대인들에게 험오감을 준다고 말한다.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한 기독교 교부들의 죄에 대한 집착이 결국에는 행복한 삶이 아니라 불행을 확대할 뿐이라고 비판한다. 이처럼, 도킨스는 종교가 부산물이라면 종교는, 그리고 성서 또한 도덕의 기반이 될 수 없음을 증명하려 한다.
논쟁적인 이 논의에서 도킨스는 성서가 내집단 중심적 사고로 이루어진 텍스트라고 규명하는 존 하텅(John Hartung)의 논문을 인용한다. 하텅에 의하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유대인에게만 적용되고 외집단에게는 배타적이다. 도킨스는 존 하텅이 내집단 중심적인 사고의 예로 든, 이스라엘의 심리학자 타마린의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침략하는 사건에 대한 설문조사 연구를 인용한다. 그는 이 야만적인 집단 학살 행위가 종교적 관점이 개입되면 정당화가 7%에서 66%로 훨씬 높아진다는 것을 나타낸다.
또한 하텅의 논문 후반부는 신약성서를 다룬다. 그에 의하면, 예수는 철저한 '내집단 신봉자'였다. 요한계시록의 14만 4천명은 모두 유대인이고 여성은 전혀 없다. 모든 것을 고려할 때, 신약성서도 유대인 중심의 배타적 내집단 원리에 갇혀 있다고 보아야 한다. 도킨스에 의하면, 종교는 분열을 조장하는 힘이고 내집단과 외집단 사이 증오의 꼬리표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북아일랜드 분쟁은 정치적임에도 종교가 분열의 기호이고 대물림되며 인도의 힌두교와 이슬람 폭동사례도 마찬가지다. 종교는 아이들에게 종교의 꼬리표를 붙이고 교육현장에서도 분리시키며 타종교인과의 결혼을 금지하고 동질혼을 고착시킨다.
그러므로 도킨스는 종교의 일관되지 않는 과거의 성서에 기반한 종교의 도덕이 아니라, 사회적 합의로서의 보편적인 도덕 원리로 '시대정신'(zeitgeist)에 입각한 도덕이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이 시대정신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시대와 함께 변화하므로, 현시대의 관점으로 과거를 판단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과거의 진보적 사고도 오늘의 기준을 적용하면 적절하지 않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무리 그 당시에 성서가 도덕의 기반이었어도 지금 시대에는 맞지 않는 폭력인 부산물이기 때문에 따를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맥그래스는 도킨스가 다윈주의적인 대안인 자연선택으로 종교의 기원과 현상에 대해서, 신을 개입시키지 않고 설명한 뒤에 도덕의 기원까지 신이나 성서, 예수가 아니라는 논증에 반론을 제기한다. 먼저, 예수의 이웃사랑을 내집단 중심의 사고이자 도덕이라는 도킨스의 주장을 비판한다. 그는 종교가 내집단과 외집단을 구별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제거해야만 한다는 도킨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맥그래스는 도킨스가 학문적 객관성을 결여하고 공정성의 기본도 결핍된 하텅의 논문에 무비판적으로 의존함을 지적한다. 그 후에, 이 논문의 내용과 다른 반례를 제시한다. 먼저 예수는 구약의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내집단 원리를 "네 원수를 사랑하라"(마 5:44)는 외집단을 사랑하라고 확장시킨다. 이것이 기독교의 중심임을 주장한다. 일명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에서 그리스도의 윤리는 유대주의의 배타성을 넘어서는 보편적인 도덕임을 확인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비유에서 진정한 이웃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 곤경에 빠진 모든 사람'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또한 맥그래스는 도킨스가 기독교와 종교를 구분하는 것에 실패했다고 주장한다. 도킨스는 종교의 '자기비판 전통'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특히 기독교 에서 강조하는 구약의 '예언자적 비판'은 구약의 제도적 종교에 대한 준엄한 경고와 심판으로 이루어져 있다. 종교 밖에서 종교를 비판하는 신의 본성을 예언자 전통은 보여 준다. 의식과 제의, 그리고 종교적 행위보다 내면성과 진정성을 촉구하고 제사장과 백성들의 종교적 위선을 목숨과 바꾸면서 질타하는 예언자의 기능은 현재에도 여전히 가능한데도 불구하고 이를 균형감 있게 다루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맥그래스는 핵심적으로 도킨스의 종교가 인간 실존에 대한 해악만 끼치고 있다고 하는 주장을 논박한다. 도킨스는 종교의 폐해를 일관되게 주장하지만, 종교가 인간의 장수와 행복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실증적 연구결과가 축적되어 있다. 그렇다고 반드시 종교가 옳다는 것과 직결되지는 않더라도 영성과 인간 행복 간의 관계 탐구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행복과 영성을 연결하는 증거들이 증대하고 있다. 종교의 해악성만을 부각하는 도킨스의 주장은 과학적 근거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비화, 풍문, 차별적인 고정관념에 근거하고 있다. 경험적이고 과학적인 연구결과라 할지라도 불리하다고 판단하면 제외시키는 편파적 태도가 확인된다.
그렇다면 신학하는 이들은 도킨스가 과학적 무신론을 가지고 한 종교비판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지고 대할 것인가? 물론, 맥그래스와 같이 도킨스의 신, 종교, 도덕에 관한 논증의 허점을 짚어내고 바로잡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도킨스가 했던 신은 망상이라는 외침보다 더 중요한 점은 종교에 대한 해악성 비판과 그 비판의 수용과 개혁이다. 도킨스의 문제제기를 공동체에게 목숨을 걸고 잘못하고 있음을 선포했던 선지자의 목소리로 들어야 한다. 이러한 입장에서 김기석은 종교인들이 합리적인 반론을 제기함과 동시에 "종교의 내부를 성찰하고 보다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5. 종교 비판과 주변부의 성찰
김기석은 도킨스의 도덕의 기반을 성서로 할 수 없다는 비판에 오히려 성서의 ‘주변’ 개념과 나눔의 삶을 제안한다. 천체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의 말대로, 과학의 역사는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 아님을 발견하는 과정이었다는 주장에 의지하여 말하자면, 코페르니쿠스는 지동설을 통하여 지구가 천체 의 중심이 아님을 규명하였고, 다윈의 진화론은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는 위치에서 생태계의 주변으로 밀어내었다. 그런데 오늘날 빅뱅우주론의 관점에서 보면, 우주의 형태는 중심을 고정할 수 없고 "어느 지점이든지 중심이며 동시에 주변"이다. 서구 중심의 세계관에서 동양이 변두리에 불과하고 특히 대한민국은 세계의 중심과는 거리가 한 참 멀다. 그런데 김기석에 따르면, 성서는 주변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출애굽 사건의 주인공들은 이집트제국의 주변인이자 노예들이었고,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도 갈릴리의 어부, 세리, 열심당원 등 사회의 중심부가 아니라 주변인들이었다.
이처럼 주변인에 불과한 그들이 로마제국의 중심부에 뛰어들어 완전히 다른 삶의 방식을 선포하고 실천하여 충격을 주었다. 정복과 약탈로 상징되는 당시 로마인들의 가치관과는 완전히 대조되는 '나눔과 희생'의 삶을 통하여 그들에게 접근하였다. 김기석은 '예수의 삶 자체가 바로 나눔'이었다고 주장한다. 가난한 이들과 빵을 나누고, 민중들과 함께 하느님 나라의 소망을 공유 하며, 고통과 마침내 자신의 몸과 피도 나누었던 것이다. 예수에게 나눔은 생명 이었다. 그 나눔의 정신과 행동을 삶의 현실로 옮겨놓는 것이야말로 과학시대에 예수의 삶을 재현하는 것이다. 과거는 인간과 인간의 나눔에 머물렀지만 지금은 온난화로 인한 지구 기온의 격변은 '인간과 생태계 사이의 나눔'과 우주적 차원으로 확장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우주적 사건으로 출현한 생명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고 있다. 우주 안의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모든 생명이 서로 의존하고 있음을 몸으로 느끼고 실천하는 영성을 보듬어야 할 때이다. 평화의 씨앗을 뿌리고 가꾸어야 할 때이다. 나눔과 생명과 평화를 위해서 성서에 나타난 예수의 삶이 여전히 이 과학의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생명의 길을 찾아가야 할지를 알려주는 예수의 삶은 이제 우주론적 지평으로 확장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5. 나가며
존 레넌이 노래한 ‘Imagine’의 '종교 없는 세상'에서 종교는 그 종교이다. 도그마로서의 종교, 즉, 종교 이데올로기만을 강요하는 편협한 종교다. 천국과 지옥을 이야기하면서 현실의 삶에서 인간에게 폭력으로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종교를 존 레넌은 거부했다. 존 레넌의 관점과 마찬가지로 도킨스는 종교가 도덕의 기원이라기보다 원인임을 선포한다. 도킨스는 그 편협함과 편향에서 나오는 폭력을 시대에 뒤떨어지는 부산물로 보고 종교가 도태되고 있음을, 도태되어야 함을 알린다. 종교가 도태되기 위해서 그는 자신의 밈복합체를 책을 통해 전세계의 예비 무신론자들에게 복제하고자 한다. 종교인들이 신의 이름으로 저지르는 수많은 폭력들에서 제거되어야 할 것은 그 신 관념이기 때문에 도킨스는 종교의 기원과 현상, 도덕에 앞서 그 신을 부정했다. 신을 부정하는 방법은 신의 존재를 말하는 자들의 주된 논리인 설계이론을 반박하고 자연선택을 주장함으로 수행하였다. 신이 없음을 논증한 이후에는 본론인 종교의 기원과 현상, 도덕의 기원을 종교와 분리시켜 시대에 적응하고 진화하는 시대정신으로서의 도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우주의 기원과 생물의 기원은 과거의 사건이다. 이 과거의 사건에 대한 단서로 과학은 밝혀내려하고 종교는 신비로 남겨두려 한다. 이 둘은 끊임없이 평행선을 이룰 뿐 수렴하지 않는다. 또한 존 레넌이 상상하는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 미래 또한 종교인에게는 희망으로, 과학자들에게는 호기심으로 다르게 받아들인다. 우리에게는 현재만이 남아있다. 현재 해야만 하는 일은 과거에 신의 이름으로 했던 종교의 폭력을 도태시키고, 미래에 도래할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종교가 해야할 주변인적 과제는 거창한 것이 아니라 약탈이 아니라 나눔이다. 신을 변증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목적으로 폭력을 행하기보다 전능한 신을 돕기보다 주변인들과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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