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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Check/신학

미로슬라브 볼프의 <인간의 번영>

by 스파르탄 2021.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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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화 시대의 인간의 번영을 위한 세계종교의 역할 

 

  1. 들어가는 말

  지난 2017년 8월에 인도네시아 현장연구를 다녀왔다. 현장연구의 목적은 단순히 인도네시아 기독교에만 국한된 현장연구가 아니라 인도네시아 내에서 기독교와 이웃종교가 맺고 있는 관계맺음에 대한 연구에 있었다. 인도네시아의 종교정책의 특징은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데, 헌법 29조에 6개 종교(이슬람, 개신교, 로마 가톨릭, 힌두교, 불교, 유교)의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며, 신앙이 없는 사람을 공산주의자로 간주하기 때문에 신분증에 반드시 신앙이 명시되어 있다. 인도네시아 인구 중 80퍼센트 이상은 무슬림이지만 기독교인은 1960년대에 크게 교세가 성장하여 현재 15퍼센트에 이른다.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당원들을 신자로 받아들여서 정부와 극우파들의 박해와 숙청에서 보호했기 때문이다. 무슬림이 다수인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인도네시아는 성탄절, 석가탄신일, 힌두교 신년 등 이웃종교의 기념일도 모두 국가 공휴일로 지정할 만큼 신앙의 자유를 실행하고 있는 국가이기도 하다. 인도네시아는 세계종교라고 불릴만한 종교 간의 연대가 이뤄지고 있는 곳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지구화의 시대에서 이러한 세계종교가 인간의 번영의 길을 제시할 수 있는가?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가?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는 세계종교가 지구화 시대에 인간의 진정한 번영을 이루기 위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종교는 번영의 비전을 제시하는 강력한 매개로 작용한다는 것이다.(20) 그렇다면 어떻게 어떤 개인이나 집단만이 번영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칭할 만큼 모든 인류가 진정한 의미의 번영을 이뤄낼 수 있는가? 볼프는 진정한 번영을 이루기 위해서는 지구화와(and) 세계종교가 어떻게 상호작용해야만 하는지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고 본다.(28) 이 비전을 제시하기 위해서 지구화의 원인인 인간의 욕망에 대한 이해를 필두로, 지구화된 구조 안에서 진정한 번영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진정한 번영을 위해서 세계종교가 해야할 역할을 재화나 서비스의 분배라는 범속적인 대안뿐만 아니라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망의 재분배까지 이르러야 함을 주장하고자 한다. 그 이후에야 비로소 볼프가 말하는 ‘진정한 번영’을 인간이 가진 욕망의 측면에서 생각해보고자 한다.   

 

  

2. 지구화 : 욕망의 결과

  

  과거 19세기에 그려진 21세기의 상상화를 보면, 택시 정류장처럼 비행기 정류장을 이용하는 그림을 볼 수 있다. 비행기에 타기 위해 버스 정류장 같은 곳에 서서 대기하고, 하늘에는 수없이 많은 비행기들이 대중교통으로 이용된다. 작가가 상상한 기술력이 발달한 그림 속에는 재미있게도 마차와 자동차는 여전히 그림에 등장하고 있다. 택시와 같은 비행기가 있음에도 마차와 자동차가 지금처럼 있을 것이라고 보는 그 상상은 아직까지는 유효하다. 공항이 있지만 여전히 적은 숫자지만 마차가 다니고, 자동차는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미래에 대한 정확한 전망을 한 화가처럼 19세기에 역사적으로, 그리고 미래에 지구화가 일어날 것임을 예견한 칼 마르크스가 있었다.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가 공저한 『공산주의 선언』(The Communist Manifesto)에는 19세기의 지구화와 앞으로 일어날 지구화의 수순이 정확히 예견되어 있다. 하늘을 나는 비행기가 상용화될 거라고 예견했지만 마차도 분명히 있을 것이라는 상상화처럼 『공산주의 선언』에서 마르크스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장에서 지구화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지역적, 국가적으로 격리되어 자족하던 옛 시대와 달리 나라들은 사방으로 교류하고, 모두 상호 의존한다.(59)

 

  지역적 영역에서 자족하던 시대와 다르게, 신대륙을 발견하고, 다양한 자원들을 발견하고, 문화가 충돌하던 주요 원인은 무엇이었는가? 왜 자족하던 시대에서 사방으로 교류하고자 하는 욕망이 일었는가? 자족의 만족에서 교류하고 상호의존하고자 하는 욕망의 근거는 단순히 과학의 발전으로만 설명이 불가능하다. 과학의 발전은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항해술이 발전하고, 총을 발명했던 것은 그 과정 중에 우연적 요소가 분명히 있었지만 ‘필요’에 의함이지 과학이라는 구조가 스스로 발생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욕망이 과학이라는 결과로 나타난다. 그래서 마르크스에게 지구화는 단순히 과학기술, 경제, 정치, 문화 분야의 발전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발전의 동력은 인간의 번영에의 욕망, 즉 부와 권력에의 욕망이기 때문에 이 욕망을 가진 개인 혹은 집단의 충돌을 의미했다. 150여년 전에  이미 자본주의 시대에 무수히 많은 충돌과 폭력이 더욱 상승할 것이라는 150여년 전 마르크스의 예언은 적중했다. 

  그렇다면 그 당시에 마르크스가 예견했던 지구화와 볼프가 말하는 지구화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이 관점의 차이가 바로 세계종교에 대해 부여하는 가치의 차이로 이어진다. 마르크스는 지구화에 대해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라는 계급이 나누어져 있다고 보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노동하는 계급에 있는 사람은 부와 권력을 독점한 사람에게 항상 착취당하는 구조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 구조의 틀을 깨기 위해서는 부와 권력을 노동하는 각 개인에게 공평하게 분배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재분배는 사회의 고정된 계급구조를 없애는 혁명이 필수이다. 그래서 마르크스에게는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다. 왜냐하면 종교는 아편처럼노동자들이 착취받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하고, 저항하기를 회피하고 오히려 인간이라면 해야만 하는 노동도 하지 않게 하는 악덕이기 때문이다. 현실을 부정하고 내세를 강조하는 그러한 신앙관에 대해서 마르크스는 현실적이지 않은 종교를 아편이라고 불렀다. 

  물론, 볼프는 마르크스의 지구화에 부분적으로 동의한다. 부의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는 것, 착취받는 인간이 있다는 것에 마르크스의 주장과 근거에 동의한다.(64) 그러나 볼프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라는 계급으로 철저히 나누고 부르주아는 악인, 프롤레타리아는 억압받는 선인이라고 보는 관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볼프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위계와 분리는 갈수록 상관이 없어지고(“평평한 세계”), 지구적 상호 연결성은 “어떤 사람은 앞서 나가게 하고,” 어떤 사람은 “출발점에 서 보려고 안간힘을 쓰게 하는” 구조로 자리잡는다.(63)     

 

마르크스는 이러한 고정된 사회 계급이라는 불평등을 혁명을 통한 부의 공평한 재분배와 평등한 노동으로 해결하고자 했지만, 볼프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마르크스와 다르다. 볼프에게 있어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는 선인과 악인으로 각각 대응되지 않는다. 오히려 같은 욕망을 지닌 인간으로 본다. 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더 많은 부를 축적하고자 욕망하고, 부를 충분히 가지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출발점에라도 서보려고 하는 욕망을 갖는다. 이 욕망은 두 부류의 인간 모두에게 한계가 없다. 그래서 볼프는 마르크스가 주창하는 혁명의 비전보다 세계종교가 제시하는 비전에 대해 더 큰 가치를 둔다. 끝없는 욕망에 의한 번영의 추구가 아니라 기독교적으로 표현하면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나타나는 삶, 모든 인간이 진정한 번영을 누리는 삶으로 가는 길을 제시하려 한다. 마르크스는 아편이기에 종교는 없애야만 했지만, 볼프는 세계종교가 연대하고 번영의 비전을 제시하는 매개로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볼프는 달라이 라마나 요한 바오로 2세를 인용하면서 지구화를 확실한 축복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고, 종교적 가치로 그 것을 지원해야 한다고 말한다.(78)

  지구화된 세계에 사는 인간에게 번영을 향한 길을 제시하는 시대예언적인 세계종교는 끝없이 욕망하는 현재 형태의 지구화에 대해서 두 가지 지적을 한다. 한 가지는 마르크스가 지적한 바대로 지구화가 모든 사람을 번영(부와 관련하여)하게 하는가? 두 번째는 볼프가 지적한대로, 번영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끝없는 노동과 소비의 굴레를 씌워 진정한 번영을 맛보지 못하게 하는가? 이 두 가지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저마다 다르게 정의하는 번영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볼프는 자본주의 구조에 속한 각 개인에게 있는 일반적인 번영 개념과 범속적인 세계에서 초월적인 영역이 연결된 진정한 번영이 관여한다고 본다. 일반적인 우리의 이해에 맞닿은 번영과 우리의 이해와 다른 볼프의 번영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3. 번영 : 올바른 방향으로 욕망하기

 

  단순히 지구화는 현상일 뿐이다. 인간이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지역을 넘어서 전 지구적인 네트워크를 맺음이다. 이 현상은 과학이 가지고 있는 가치중립성과 마찬가지로 지구화는 인간이 무엇을 욕망하느냐에 따라 자기 물건을 떼어주는 칼로도 타인의 물건을 갈취하는 검이 되기도 한다. 이 때에 인간은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함께 살아갈 방법을 모색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볼프는 ‘모든 인류가 공동의 운명으로 묶여 있다는 막연한 인식 외에 지구화는 이와 같은 해로운 영향에 맞설 도덕적 자원이 부족하다’고 말한다.(212) 이 도덕적 자원의 부족은 여러 다양한 삶의 방식으로 나타나는 번영들에 대해서 어떠한 비전도 제시해 줄 수 없다. 번영에 대해서 다원적인 인간은 모두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볼프는 『인간의 번영』의 서문에서 번영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단순히 즐기는 삶, 즐겁고 평안한 삶이 연상된다고 말한다. 또한 번영은 안락한 의자에 앉아서 어떠한 고난도 없이 평안한 삶이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스포츠에 열광하는 삶, 인간의 식욕, 성욕, 수면욕이 완전히 충족되는 삶일 수도 있다. 이러한 다양한 인간의 번영에 대한 관점을 하나로 통합시키려고 하는 것이 볼프의 목적인가? 예수의 가르침에 모든 종교가 통합되어서 하나의 세계종교이자 기독교인으로서 그 하나의 가르침으로 번영하는 삶을 다른 이웃과 나누라고 하는가?

  볼프에게 있어 진정한 번영은 ‘일상적 실재에 굳건히 발을 디디고 살면서도 인간은 별들 너머에 있는 초월적 영역을 향해 손을 뻗는다.’(117) 우리 인간은 육체를 가지고 다른 인간들과 함께 이 땅의 영역에서 상호연결되어 살아간다. 육체와 땅이 가지고 있는 한계는 명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은 번영을 목적으로 다양한 활동을 한다. 일을 해서 물질적인 가치를 쌓기도 하고, 휴식을 취하면서 다양한 스포츠와 같은 여가활동들을 함으로써 자신만의 번영을 누리려고 한다. 이 모든 것의 도구가 되는 것이 자본주의 시대에는 재화인데, 일상적 실재에만 손을 뻗는 것은 진정한 번영에 이르지 못한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초월적 영역을 향해 손을 뻗는 본성이 있다. 그리고 이 본성은 필자가 보기에 욕망이다. 진정한 번영은 단순히 유한한 것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영역을 향해 무한히 욕망함이다. 인간은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려고 할 때, 그 것을 갖기 전에 욕망한다. 그리고 그 것을 차지한 이후에도 이 만족하지 않는다. 더 나은 것, 더 갈증을 채워줄 만한 것을 욕망한다. 인간은 재화와 같이 물질적인 것에서부터 사랑이나 중용과 같은 숭고한 가치들을 향해서도 욕망한다. 욕망은 곧 소유하고 싶은 열망이기 때문이다. 만족은 이 열망이 없어진 상태를 말하는데, 이 열망이 없다면 이 땅에서 실재하는 일이 가능할까? 완전히 배가 부르면 밥을 먹지 않는다. 만족할 정도로 잠을 잔 뒤에 잠이 오지 않는다. 그렇지만 곧 이어 배는 고프고 피곤은 다시 오기 마련이다. 이 욕망은 사라지지 않고 우리 안에 항상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인간의 번영은 인간 개개인이, 그리고 집단이 가지고 있는 욕망을 올바른 방향성을 갖도록 인도할 때 성립된다. 여기에서 올바른 방향은 단순히 발전이 아니다. 발전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전체적인 자원이나 부가 늘어나면 나눌 것이 양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에 올바른 욕망의 실현이 가능하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러나 양적으로 증가한 부를 분배하는 정의가 없이 각 개인이나 집단이 가지고 있는 부에 대한 욕망대로 분배가 일어난다면, 그 것은 칸트가 말했던 것처럼 “인간이 서로 가까이 살면 평화가 아닌 전쟁이 나기 마련”이거나 “증오심이 폭발할 것이라는 지속적 위협”에 시달리는 상태로 지구화된 세계를 몰아갈 뿐이다. 그래서는 인간에게 일어나는 진정한 번영은 가능할 수 없다. 

  진정한 번영은 부를 욕망하는 차원에서 더 높은 초월적 가치를 욕망하고, 그보다 유한한 가치에 덜 욕망할 때 일어난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말에서 떡이 유한한 가치, 하나님의 말씀을 기독교적으로 본다면 초월적 가치로 보았을 때, 이 두 가치를 인간은 동시에 욕망하지만 초월적 가치를 우선 갖고자 하고, 유한한 가치를 그 초월적 가치가 제시하는 방향으로 쓸 때, 우리는 번영할 수 있다. 이는 다시 말해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망을 악으로 규정하고 없애고 억압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가치를 더욱 욕망할 때 가능하다. 인간이라면 마땅히 가지고 있는 욕망을 초월적 가치에 우선적으로 분배하는 역할, 그 비전은 누가 제시하는가?   

 

 

4. 세계종교의 역할 : 인간의 욕망을 분배하기

 

  종교를 비판하는 이들은 분쟁하는 원인을 오히려 제공하는 종교, 폭력의 원인이 되는 종교라고 본다. 볼프는 종교를 비판하는 이들이 종교를 바라보는 관점은 ‘인간의 본성’(228)이 악하기 때문이라면서 종교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 만든 구조라는 한계점을 갖는다고 본다.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이며 자신의 이익만을 좇는 것이 인간이 가진 한계이고 인간이 만든 종교라는 구조 안에서 한계지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이 가진 본성을 우리 인간은 이성으로 충분히 제어가 가능하다고 보던 시절이 있었다. 그 본성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는 계몽주의에서 급속도로 빠져나온 계기는 세계 1차, 2차 대전, 각지에서 일어난 홀로코스트(대량학살)였다. 본성을 다스릴 수 있다고 믿었던 그 모든 믿음 깨진 뒤에 인간의 본성이 악하기 때문에 전쟁과 분쟁이 끊임없이 발생한다는 현실 판단에서 멈춘다면 그 것은 볼프가 지적한대로 그들이 말하는 인간 본성의 악함보다 더 극악한 허무주의에 빠지는 꼴이 된다.    

  물론, 결자해지(結者解之)라는 말처럼, 세계종교는 각 종교 내에서 일부라고는 하지만 그 일부가 인간을 향해 무자비한 폭력을 행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 무자비한 폭력의 근저에는 단순히 사고에서 멈추는 배타성이 아니라, 행위하는 철저하게 초월적인 영역과 범속적인 영역을 나누고, 범속적인 영역에 속했다고 판단되는 이들에 대한 폭력으로 점철되거나, 혹은 초월적인 영역에 관심을 두고 있다고 의태한 뒤에 범속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 억압하는 2가지 방법을 가지고 있었다. 이슬람의 IS나 역사적으로 로마 가톨릭의 십자군 전쟁을 보면 초월적인 영역에서 범속적인 영역으로 넘어갔다고 해서 일어나는 폭력보다 오히려 자신들의 범속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 초월적인 영역을 대의명분 삼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세계종교가 문제였고, 그리고 그 문제를 푸는 해결책 역시 세계종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미로슬라브 볼프의 주장이다.  

  볼프는 세계종교가 가지고 있는 인간 번영의 개념이 “건강, 부, 다산, 장수에 대한 ‘자연적’ 욕망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말한다.(213) 이는 기독교적으로 ‘떡’에만 국한되지 않는 번영이다. 세계종교가 제시하는 진정한 번영의 길은 초월성의 영역을 인간에게 개방함으로써 인간이 자신을 중심에 두는 것보다 온 인류를 향해 열리고, 인류를 중심에 두기를 욕망하도록 한다. 단순히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그리고 경작해야만 주어지는 산물만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산물을 먹고 즐거워하고, 삶을 살아갈 에너지를 얻는 타인에게 완전한 선물을 주고자 하는 욕망을 가르치고 훈련하게 한다. 인간이 자기중심적으로 얻고자 하는 욕망을 타인과 함께 잘 살고자 하는 욕망으로, 초월적인 사랑에의 욕망으로 적절하게 분배하는 역할이 세계종교의 역할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연대하지 못하고, 자본주의적인 악순환의 고리에 있는 시점에 있어서 세계종교는 어떤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가?

  ‘화해’이다. 지구화로 일어난 광범위한 폭력 사태와 부의 착취와 불평등 문제, 지구 생태계 파괴의 문제에서 세계종교는 화해의 비전을 제시해야만 세계종교로써의 도구적 역할을 완수한다. 지구화된 세계에서는 반드시 갈등은 발생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저마다의 일상에서 추구하는 가치는 제각각 다르고 그 가치를 추구하는 방식 또한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상충하는 부분이 반드시 발생한다. 그러나 이 갈등은 해소가 되고 조정이 될 수 있고 이 갈등의 한계는 다원적인 모든 이의 선택할 자유와 이 가치를 추구할 자유는 ‘나’에게만 특권이 아니라 타인에게도 반드시 허용되어야 하는 상호성의 원칙이 있을 때 가능하다. 갈등은 자유를 인정하고 이 자유가 만인에게 반드시 허용된다는 상호성의 원칙 안에 있을 때, 욕망을 바른 방향으로 이끈다. 세계종교는 자유와 상호성의 원칙을 ‘황금률’의 비전을 지구화된 세계에 보여주는 종교들이다. 

   

 

5. 나가는 말 

 

  지구화는 마르크스와 볼프가 지적했던 바와 같이 인간이 다다를 수밖에 없는 미래였다. 과학의 발전이 원인이 아니라,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망이 자기 지역을 넘어 세계에 있는 모든 인간들이 상호연결성을 갖게 하는 동기를 제공하기 때문에 과학이 발전했다고 보는 것이 순서에 맞을 정도이다. 전화기의 발명이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과 연결할 수 있는 원인이 아니라, 인간이 가지고 있는 타인과 연결되고자 하는 욕망이 가장 큰 원인이고, 전화기는 그 원인에 의한 중간 다리 역할인 것이다. 이러한 지구화가 일어나면서 인간의 욕망은 번영을 추구하며 범람했다. 양적, 질적으로 한계가 있는 재화를 소유하고 소유할 수 없는 인간마저도 소유하려는 이 범속적인 번영을 향한 욕망은 나에게는 특권을 부여하면서 타인의 권리는 존중하지 않는 폭력이었다. 나의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연결’되고자 할 때, 전쟁이라는 형태로 영토와 부를 빼앗으려는 시도가 역사에 기록된 것만도 헤아릴 수 없다. 이 때, 세계종교만은 자신의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넘어갈 때, 범속적인 가치를 욕망하기보다 초월적인 가치를 전하기 위해 넘어갔던 것이 다른 점이다. 

  그래서 번영은 범속적인 영역이 아니라 오직 초월적인 영역에만 속한, 어떤 정신적, 영적인 것인가? 볼프는 “떡으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말한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 가르침은 범속적인 영역에서 떡을 먹고 살지만 초월적인 가치를 추구하고 공유하며 사는 삶을 말한다. 일반적인 번영은 떡의 양과 질이지만 진정한 번영은 떡을 타인과 나누려고 하는 초월적인 사랑을 추구한다. 떡으로‘만’이 아니라 시야가 떡 ‘너머에’ 굶주린 자들에게 넓혀짐을 말한다. 범속적인 것을 욕망하던 내가 초월적인 것을 욕망함으로 범속적인 것을 나를 초월하여 나누는 삶이, 상호연결된 지구화 시대에 진정한 번영의 길이다.

  이를 위해서 볼프는 이러한 번영의 비전을 다른 어떤 것도 아니라 세계종교가 제시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비록, 역사적으로 명백하게 종교가 갈등의 원인이었던 적이 있었음을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인간이 이기적이기 때문에 종교 또한 무용하다는 허무주의에는 단호히 빠져나올 것을 주장한다. 이는 모두가 불의를 행하기 때문에 불의는 어쩔 수없다는 것인데, 정의를 말하고 행동하지 않는 그러한 판단이야말로 무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볼프는 세계종교가 지구화된 세계에서 종교 간 갈등을 줄이고 더 나아가 진정한 번영의 비전을 제시하기 위해서 세계종교가 제시하는 ‘황금률’을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자유를 존중하지만, 상호연결된 타인의 자유 또한 나의 자유처럼 인정해야만 갈등이 화해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삶의 방식이 달라서 겪게 되는 갈등이 화해로 갈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하는 종교가 지구화된 세계에서 세계종교로 인정을 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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