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말, 스페인 군대가 중남미 대륙을 정복했다. 이 때, 중남미 지역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을 이끌고 아뚜에이 추장은 스페인 군대에 항거했다. 그러나 원주민들은 스페인 군대의 총포와 갑옷, 훈련된 군인들의 힘에 몰살당했다. 아뚜에이 추장은 스페인 군대에 항거하다가 산 채로 화형을 당했다. 장작더미 위에 묶여있는 아뚜에이 추장의 옆에 스페인 종군 신부가 왔다. 그리고 ‘카톨릭 영세를 받으라’고 말했다. 만약 세례를 받고, 하나님을 믿게 된다면 형벌을 감해주겠노라고 했다. 산 채로 화형당하는 고통을 당하지 않고, 사형한 후에 시체를 불에 태우겠다고 말했다. 살아서 고통없이 죽고, 죽어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말했다. 이 말에 에뚜에이 추장은 이렇게 묻는다. ‘평화롭게 살고 있던 원주민들을 죽이고, 그 토지와 재산을 빼앗고, 딸과 아내를 강간한 이 군인들은 어떻게 되는가?’ 신부는 ‘이들은 영세를 받았기 때문에 천국에 간다’고 말했다. 에뚜에이 추장은 ‘그렇다면, 이런 짓을 하고도 가는 곳이 낙원이라면 나는 그 곳에 가고 싶지 않다. 불을 붙여라.’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의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을 읽고 난 뒤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에뚜에이 추장의 몸에 불을 붙이는 잘못된 복음전파 방식이었다. 이 대화와 뉴비긴 목사의 책은 상당히 유사하다. 스페인 군대의 종군 신부와 에뚜에이 추장의 관계와 영국 출신의 뉴비긴 목사와 타종교인의 관계로 보였다. 대화하지만 복음과 그 복음으로 받는 구원에 관해서는 좁힐 수 없는 견해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타종교인과 대화의 창구는 열어두고 그러나 결국에는 타종교를 진리를 가지고 있는 기독교로 대체해야만 한다고 보는 이 모델을 폴 니터는 부분대체모델이라고 말한다.
부분대체모델은 타종교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일반적인 계시들을 가지고 타종교와 대화하려 한다. 그러나 결국에는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 ‘살리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고, 타종교에 하나님의 계시는 있을 수 있지만 구원은 없다고 말하는 ‘죽이는’ 결과를 가져온다. 에뚜에이 추장과 대화는 하지만, 이 땅 위에서 에뚜에이 추장에게 구원은 없다. 진정한 구원은 영세를 받음으로, 즉,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데, 그 구원도 현세에서 이뤄지는 구원이 아니라 종말론적, 혹은 내세적이다. 이에 어떤 사람이 반발하지 않을 수 없을까? 왜 복음(Good News)은 총과 칼을 들고 가져오는가? 기독교의 복음은 왜 만인에게 복음으로 들리지 않을까?
스페인 군대에게는 자신감이 있었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이 복음이 원주민들에게는 가장 갚진 소식인 것으로 알았다. 성경에 있는 ‘땅을 정복하라’라는 구절이 이들의 침략을 정당화시키는 절대적인 근거가 되었다. 정복과 선교는 스페인 군대에게 같은 의미였다. 이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즉 하나의 진리를 수호하며 그 진리를 전파한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뉴비긴 또한 이와 같은 스페인 군대의 중남미 대륙으로 향하는 진군처럼 자신감을 가지라고 말한다. 다원주의 사회에서 복음을 전할 때, 직면하는 문제는 타인이 이 복음을 유일한 진리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무수히 많은 진리 가운데 있는 진리로 보기 때문에 뉴비긴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감을 가지고 유일한 복음을 전하라고 독자들을 자신의 책 말미에 독려한다. 다원주의 사회 내에서 복음을 전파하려 할 때, 자신감이 필요하다고 한다.
뉴비긴은 바울의 복음전파, 선교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바울이 모든 복음 전하기를 다하고 다른 곳으로 또 복음전파여행을 다닌 것에서 착안했다. 뉴비긴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선교명령은 모든 사람을 제자삼으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복음(Full Gospel)을 온전히 전하라는 의미이다. 타종교인이 듣던지, 듣지 않던지 이 복음은 자기중심성을 띈다. 자신이 성경에서 해석해낸 것들 중에, 혹은 기독교인들끼리 회의를 통하여 복음의 정수를 이끌어내고 그 것을 ‘모든 복음’이라고 명명하고 전할 때, 타종교인의 생각과 느낌은 관심이 없다. 그래서 뉴비긴은 다원주의 시대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소심’하게 하려는 경향에서 벗어나라고 요구한다. 복음은 주체적인 활동이기 때문이다.
물론, 뉴비긴은 영국 사회의 다양한 인종적 배경,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이루고 있는 다원적인 영역에 대해서는 현실적으로 인정한다. 타인의 가치관과 삶의 방향을 존중하는 다원성을 비판하지 않고, 다원성과 다원주의를 구분하여 다원주의를 비판하며 기독교인들에게 경계하기를 촉구한다. 다원성으로 개개인을 존중하는 것은 공적으로 올바른 일이지만, 종교의 측면에서 진리가 다양하다고 보는 종교 다원주의는 반대한다. 또한, 하나의 진리를 다른 언어로, 다른 문화 하에서 다양한 망원경을 통해 보기 때문에 결국에는 같은 진리를 다르게 말한다고도 보지 않는다. 진리는 오직 기독교 안에만 복음으로 있기 때문에 이 진리를 다른 관점으로 보았다고 말할 수 없다고 말한다. 구원과 관련된 진리는 타종교가 어떤 형태로도 볼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플라니를 인용하여, ‘두 진영은 똑같은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이상으로 똑같은 증거를 증거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 동일한 경험이라도 개념적 틀에 따라 다른 사실과 다른 증거의 모습을 지니게 되는 것’으로 본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직관과 계시를 언어표현의 방식으로 설명한다. 직관과 계시는 동일하게 어느 순간 빛처럼 번뜩인다는 것을 설명하며, 직관과 계시의 유사성을 밝힌다. 뉴비긴은 직관과 계시는 단순히 언어표현의 방식 차이인데,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질서를 인간이 직관적으로 깨달을 때, 이는 계시를 받은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의 차이는 성경에도 적용된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나 말씀(계시)하셨다’는 내용과 기독교인이 아닌 이들이 이를 해석하여 ‘모세가 신적 깨달음(직관)을 얻었다’고 보는 것은 결국 같다. 직관과 계시는 기독교인과 타종교인이 대화가 가능한 언어적 표현의 차이이다.
이렇듯 뉴비긴은 타종교인, 비종교인과 그들의 용어를 가지고 계시의 측면을 설명함으로 진리가 여기에 있음을 알리고 있다. 그러나 뉴비긴은 타종교를 기독교로 대체시키는 진리, 복음, 구원에 있어서는 타협의 여지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성을 변호하고 이 세상에 유일한 구원자로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이 구원을 주는 예수의 유일함에 대해 복음을 전파할 때, 어울리지 않는 선교의 방법을 제시한다. ‘선교는 불신자의 질문에 대한 응답’이라고 주장하는데, 그의 주장은 타인을 불신자라고 규정하는 것에서부터 질문에 대한 응답이 아니다. ‘불신자’라고 타인이 질문도 하기 전에 믿지 않는 사람으로, 복음이 없는 사람으로 여기는 이 태도는 질문과 응답이라는 대화를 이루어질 수 없게 한다.
뉴비긴은 바울의 말을 인용하여, 선교 사역의 목적과 목표는 이 세상 모든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개종시키는 것으로 말하지 않고, ‘복음을 남김없이 전파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복음이 궁금한 이들의 질문에 답하고 그 이후에는 모든 복음을 남김없이 전파했으니, 선교사로서의 할 일은 없다. 이 이후로는 하나님의 선교로 본다. 그러나 이러한 탈중심적이고 수동적인 선교 사역의 시각을 보여주는 듯하지만 또한 뉴비긴은 이슬람을 비판하면서 다시금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타종교인에 대한 존중과 대화하려는 시도를 스스로 철회한다. 한 예로, 이슬람을 기독교 세계가 무너진 후 십자가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제공하는, 십자가 죽음을 부인하는 것이 이슬람교의 핵심 가르침이라고 이야기한다. 과연 이슬람교의 핵심 가르침이 십자가상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부인하는 일인가? 이슬람교보다 유대교가 예수 그리스도를 더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뉴비긴은 이슬람교를 예로 들어 설명할까? 예수 그리스도를 복음, 진리, 구원의 오직, 유일한 길임을 부인하는 유대교에 대한 이야기는 왜 들어있지 않는지 의문이다.
복음의 자신감은 타종교인에게 향하는데, 이 자신감은 권력을 가지고 있는 다원주의 사회의 유대인들 앞에서는 다시금 ‘소심’해진다. 칼 바르트는 거짓 종교의 특징이 하나님의 계시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이라면 이럴 것이다, 라고 예상하는 자기 자신을 따름이라고 했는데, 뉴비긴 목사 또한 이 비판을 면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뉴비긴 목사가 인용했던 바울은 그 당시의 어떠한 권력에도 굴하지 않고 모든 복음을 전파하였는데, 그 자신감과 뉴비긴 목사의 자신감은 다른 종류이다. 뉴비긴 목사는 자신의 책을 쓴 동기와 같이 교회가 전전긍긍하고, 겁먹은 태도로 복음을 전하기보다, 자신감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스스로 자신감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자신이 인용했던 바울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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