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엄을 못 치는 사람이 어느 날 물에 빠졌다. 물에 빠지자마자 이 사람은 자신의 오른손으로 스스로의 뒷덜미를 낚아채었다. 그 후, 천천히 자신의 몸을 물가로 이끌어 갔다. 결국, 자신이 스스로를 구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이 가능할까? 헤엄을 못 치는 사람이 스스로를 자신의 손으로 구원하는 일이 가능할까?
헤엄을 못 치는 사람이 스스로 자신을 구한다는 것은 명백히 불가능하다. 근본주의자나 복음주의자들은 타종교에 왜 구원이 없는지를 설명할 때 자주 물에 빠진 자의 비유를 활용한다. 실제로, 헤엄을 못 치는 사람이 물에 빠져서 자기 자신을 스스로 건져낸다는 것은 운동법칙에 위배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고, 타종교에는 구원이 없다는 이데올로기를 우리는 배타주의와 포괄주의로 명명했다. 그러나 폴 니터(Paul F. Knitter)는 자신의 책, 『종교신학입문』에서 이 두 주의를 대체모델이라는 하나로 묶었다. 배타주의는 완전대체모델로, 포괄주의는 부분대체모델로 대체되었다. 니터는 이처럼 오직 구원은 기독교에만 있다는 두 주의를 하나의 틀에 넣어 대체모델로 명명했다. 또한 그 안에서 계시의 관점에서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완전대체모델과 부분대체모델로 나누었다. 타종교에 구원이 없다는 관점에서는 공통점을 보였지만, 완전대체는 타종교 안에는 신적 계시가 없다고 주장하고, 부분대체는 하나님의 일반계시는 타종교인들에게도 미친다고 주장한다. 니터의 균형적인 시각으로 두 대체모델의 계시와 구원의 관점을 명확히 하려 한다.
먼저, 니터는 칼 바르트(Karl Barth)를 다른 종교를 이해하는 완전대체모델의 신학적 기초를 놓은 신학자로 평가한다. 니터의 이러한 평가에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은 그의 종교관이다. 칼 바르트는 ‘종교’에는 믿음이 없다고 단언하는데, 바르트가 이야기하는 종교는 신적 계시를 따르기보다 신적 계시에 대한 인간의 예상을 따르는 것으로 정의한다. 그래서 바르트는 타종교와 기독교를 동시에 비판한다. 바르트의 관점에서 만약 기독교가 하느님의 계시를 예수 안에서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시라고 믿는 자신들의 예상을 따라서 선행을 한다면 이 것은 신적 계시를 받을 것으로 볼 수 없다. 니터는 바르트의 이러한 입장에 대해 “바르트는 그리스도교가 세상의 어떤 다른 종교보다 낫다고 주장할 만한 경험적 증거를 찾지 못했다”고 보았다.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가 신적 계시를 자신들이 실천하고 있는 근거로 보지만 결국에는 자신들의 생각대로 행하고 있음을 비판한 것이다. 그리하여 바르트는 모든 종교는 참 종교가 아니라 하느님의 일하심을 막는 거짓 종교로 본다.
그런데 이 비판이 결국 기독교가 모든 거짓 종교 중에 참 종교로 역전된다. 모든 종교가 신적 계시를 받아서 행위하는 기만, 거짓을 저지르지만 예수로 인해, 자기 자신이 거짓임을 깨닫게 된 기독교는 그 중 참 종교로 역전된다. 더 이상 신적 계시의 예상으로 움직이는 거짓종교가 아니라, 예수라는 하느님의 신적 계시를 받은 기독교는 그 계시를 예상하지 않고, 직접 받아들이고, 그를 통해 구원을 받는 유일한 참 종교가 된다. 신적 계시대로 움직이는 종교만이 참 종교이며 그러나 기독교 안에 예수라는 계시가 없이 행위한다면 거짓종교일 뿐이다. 이렇듯 계시와 구원은 완전대체모델에서 짝을 이뤄 어느 하나 포기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 그렇기 때문에 타종교와 대화할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니터는 이러한 대체모델이 타종교와 대화가 아니라 오히려 더 자신들의 하나뿐인 진리 주장을 서로가 서로에게 주장하는 ‘거룩한 경쟁’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부분대체모델은 타종교와 대화가능성이 있는가? 이에 대해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는 “모든 종교사는 인간 실존 구조 안에 전제된 신의 신비를 보여 주는 역사”라고 주장한다. 바르트는 모든 종교는 신적 계시를 예상하고 행위하는 거짓종교라고 주장했다면, 판넨베르크는 이 예상을 ‘인간 실존 구조 안에 전제’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이 전제로 신의 신비를 인간이 자신의 삶, 특히 역사적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이처럼 부분대체모델의 계시는 타종교인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는 앞서 대체모델이 가진 공통된 특성으로 구원은 오직 기독교에만 있다는 주의를 갖는다. 판넨베르크는 구원관에 이르러서는 바르트의 주장과 맥을 같이 한다. 예수 이외에 다른 구원의 길이 없다는 바르트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이 오실 임박한 미래는 예수를 통해 현재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구원에 이르는 다른 길은 없다고 말한다. 니터가 설명하는 대체모델의 기독교인들에게 구원은 ‘하느님과 일치하고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를 받는다는 확신 속에서 살며, 죽은 뒤에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는다’는 뜻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처럼 두 대체모델은 타종교를 기독교로 대체하려고 끊임없이 시도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니터는 부분대체모델이 완전대체모델과는 다르게 타종교와 대화한다고 말한다. 대화를 통해 타종교와 기독교 사이의 오해, 편견, 갈등 등을 완화할 수 있다고 보는데, 판넨베르크는 더 나아가 서로 다름이 곧 진정한 대화에 이를 수 있는 근거로 본다. 그러나 대화가 어떤 종결점을 지향하지 않고, 의견의 일치를 바라보지 않는 한에 있어서는 이뤄질 수 있겠지만 대체모델은 항상 ‘구원’이라는 대화 한계선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판넨베르크의 서로 다름이 진정한 대화로 이끈다는 말에는 동의하지만, 니터가 말한 ‘하나이며 유일한’을 말할 때에도 진정한 대화가 가능할까? 관용을 예로 들면, 관용을 베푸는 사람과 관용을 받는 사람의 권력, 사회적 지위, 금전의 유무 차이가 전제되어 있다. 힘없는 사람이 권력자에게 관용을 베풀 수는 없다. 종교 간의 대화에서도 부분대체모델이 지향하는 대화는 결국에 나에게는 구원이 있지만 너에게는 없다, 라는 구원에 관한 다른 입장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
앞서 서두에서 물에 빠진 사람의 비유에서 ‘헤엄을 못 치는’ 사람은 과연 헤엄을 못 치는 사람일까? 기독교로서 타종교에는 구원이 없다고 전제하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에 대해, 그 거룩한 것에 의심할 필요를 느낀다. 헤엄을 잘 치는 사람이 물에 빠지면 자력으로 구원이 가능하고 헤엄을 못 치지만 물이 얕아서 걸어서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대체모델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계시와 구원이 없는 타종교로만 여겨지고 있지만 타종교 안에서 계시와 구원이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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