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다룰 주제는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인생이 과연 한심하기만 한 인생인가...이다.
이러한 지극히 자기혐오적인 질문에서 스스로 변론하고, 다독여서, 다시 외양을 넓히는 작업에
두려움을 떨치게 하기 위한 글일 거시다.
인생을 논하기에 아직 나는 떠리뜨리(33)밖에 되지 않았으나,
누군가에게는 33살이 또 상대적으로 조상을 넘어 살아있는 리빙 삼엽충이므로.
또 나에게는 이 글작업이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아주 값진 작업이므로.
내 33년의 인생을 돌아보면,
매번, 항상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짓의 반복이었다.
그때마다 매번 누군가는 위로의 말과 함께 꼭 아래와 같은 충고를 했다.
소를 잃기 전에 외양간을 고쳤어야지~
여친이 떠나기 전에 있을 때 잘했어야지~
사기당하기 전에 욕심을 덜 부렸어야지~
투자처를 잘 선택했어야지~
누가 몰라? 몰라서 당하는 것도 있겠지만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편협이 가장 큰 요인이야!
이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과거의 나를 되돌아보고 반성하기는 커녕
항상 더 치솟는 화에 못 이겨 될 대로 되라 식의 자포자기 그로기 상태로 헤롱거리기 일쑤였다.
그래서 더 이상 이러한 남의 소리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기준을 정했다.
남이 자신의 인생도 아니고 나(타인)의 사건이 이미 벌어진 시점에서 손쉬운 가치판단을 한다면,
귓등으로 듣고 흘려버리자. 딱 이렇게 정했다.
남이 자신의 손해도 아니고, 타인의 소를 잃은 순간을 관찰하고 그에 따른 해석을 내놓는 것은 쉽다.
이미 벌어진 사건이기에. '내 그럴 줄 알았지.'는 몇천년간 이어져 오는 인간이 구사한 모든 언어들 중에
가장 가치less한 말일 것이다. 그럴 줄 알았으면 미리 알려주지! 무슨 심보로 일어난 뒤에 그런 소리로
속만 뒤집어 놓느냐 이 말이다.
따라서 하등 쓸데없는 과거만을 분석해주는 자칭 전문가의 말은 귀찮은 노이즈로 취급해야 한다.
과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를 스스로 머리 터지게 물으면서 준비해도 모자랄 판에
이미 벌어진 일, 이미 닥친 일에 대해 술회하고 다른 이의 노이즈에 마음을 지킬 일이다.
그래, 물론 그들의 말대로 진작에 대비했다면 더 좋았겠지. '예견'하는 능력이 출중했다면 더 좋았겠지.
소를 잃지 않기 위해서 외양간을 미리 고친 사람 >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사람 > 소를 잃고 외양간에서 런한 사람
순으로 순위가 매겨지겠지. 당장에는.
그러나 미리 외양을 고친 사람이라고 이전에 부서진 경험이 없었겠는가.
어느 누가 앞날을 적확히 예견만 할 수 있단 말인가.
항상 예견할 수 없는 일이 따라오고, 예견하지 못한 틈바구니로 소들은 쇼생크 탈출을 감행한다.
중요한 것은 소들이 탈출하고 있는 구멍을 얼마나 빨리 알아채고 어떻게 '대응'하느냐 이다.
이 대응들이 모여서 언젠가는 아주 가끔은 '예견'하고 준비되어 소가 빠져나갈 만한
나의 외양 그물코가 촘촘해지는 것 아니겠는가.
따라서, 우리가 수정해야 할 목표점은 불가능한 모든 일을 예견하는 초능력자가 아니라
내 소를 잃을 상황에서도 기민하게 반응하여 최소한으로 잃고, 그 틈, 외양을 고치며 또한 넓혀나가는 경영자이다.
물론, 소로 상징되는 것들, 지인, 가족, 돈 등등의 사랑해마지 않는 가치들이
현재의 나의 외양이 어설프고 좁은 나머지 술술 빠져나가는 모냥을 살펴보노라면 억장이 무너진다.
잠들기 전에 이랬더라면, 저랬더라면을 한참을 하다보면 없던 불면증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서
가슴 위에 올라타서 묵직하게 짖누르기도 한다. 덕분에 무거운 가슴을 부여잡고 고통에 밤을 지새기도 한다.
그렇게 괴롭다가도 어떤 마음이 드냐면, 마그네슘(우울한 기분을 사라지게 하는 효과가 있다.)을 며칠 때려넣고
푹 자고 일어나서 이랬더라면 -> 이렇게 바꾸자, 저랬더라면 -> 저렇게 바꾸자 로 또 한번 우울에 짖눌린 가슴을 펼 일이다.
현실성 있는 나만의 방안을 힘있게 더듬어 갈 일이다.
나의 잘못된 선택으로 내 외양이 부서진 것이든, 나의 선택과 상관없이 예견하지 못한(ex 코로나19) 사건 탓에 외양이 박살나던지
내가 죽지 않는 이상에 인생에 Daum 기회는 Naver 닫히지 않았다.
어떤 유명한 이도 이런 말을 했다잖은가.
새는 자신의 알(세계)를 부리로 쪼아 깨야만 더 넓은 세계로 나올 수 있다고.
내 외양을 깨부수는 모든 내외부적 시련은 오히려 내 외양, 세계를 넓혀갈 수 있는 기회이다.
뼈가 저릴 만큼 아픈 경험은 말 그대로 본쉐이커로 정신과 몸을 뒤흔들어 놓기 때문에
괴로우면 괴로울수록 기억이 몸에 아로새겨져서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이 기억을 단순히 괴로운 기억으로 치부하고 몸이 떨리게 사무치게 괴로워만 할 것이냐,
아니면 이 괴로운 기억으로부터 개선될 사항들을 정리해서 스스로에게 보고하고 앞으로 다시는 맛보지 않게
대비하고 나의 외양을 넓힐 기회로 전환시키느냐는 온전히 나의 몫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소를 잃어가면서 결국에 소를 어마어마하게 수용하게 될 외양을 넓혀가자. 시팔.
p.s 이 글은 깡통계좌를 부여잡고, 이번 생은 망했다고 거의 2주간 잠 못자고 귀한 살 10키로가 빠진 뒤에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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