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키투스와 이방인의 사도 바울의 “명예” 관점에 대한 비교
명예는 사전적으로 “훌륭하다고 인정되어 얻은 존엄이나 품위”이다. 또한, 신분이나 지위를 나타내는 명사 앞에 붙여, “공적을 기리거나 경의를 표하는 뜻으로 수여하는 칭호”의 뜻도 있다. 이 두 가지 의미에서, 명예는 이상적인 목적, 가치를 향해 훌륭한 성취를 이뤄낸 인물들에게 수여된다. 이 명예는 타인의 관점 하에서 부여된다. 누군가가 훌륭한 이유는 그의 삶의 가치를 인정하는 다수의 타인의 공감을 불러와야 하기 때문이다. 역사가가 역사를 기술하면서 그 당시와 현재 사회가 지닌 가치, 필요하다고 여겼던 미덕의 기준을 가지고 그 기준에 부합하는 이에게 명예를 수여한다. 이 ‘수여’에는 반드시 역사가 자신의 가치판단이 들어있고, 그 관점에 의해 과거의 사료는 편집되거나 윤색을 거치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로마의 역사가인 타키투스(Tacitus)의 역사 서술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저술되었다. 그 목적은 ‘로마의 명예로운 시민상은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제시하는 것이었고, 그 목적으로 이루기 위해서 여러 역사적 인물들을 그의 역사서에 배치한다. 조한욱은 타키투스의 역사서술 의도를 “역사적 인물들의 고귀한 행동이 기록되지 않고 넘어가지 않도록, 또한 악인의 사악한 말과 행동이 후대의 지탄을 받도록 하는 것”이었다고 본다. 명예로운 행동을 한 인물과 불명예스러운 행위를 했던 인물을 극명하게 대비시킴으로서 타키투스는 자신이 이상적으로 바라보는 로마의 가치, 그 로마를 구성하는 명예로운 시민상을 구성하고 있다.
왜냐하면 타키투스가 기술할 당시 로마의 시대상은 그의 관점으로는 환락과 악덕이 지배했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로마의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그는 역사를 기술했다. 특이한 사항은 타키투스는 아우구스투스가 기틀을 닦았던 중앙집권의 통치 구조의 한계를 네로 황제에 이르기까지 명확하게 적고 있다. 네로 황제의 개인의 타락, 불명예스러운 아그리파나와 옥타비아 존속살해를 들어, 중앙집권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고 있었다. 황제에 오른 인물의 됨됨이에 따라서 독재체제는 로마의 명운을 가로막는 제도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로마의 시대상으로 인해서, 타키투스는 명예로운 국가의 모습을 내부에서 찾기보다 게르만족에게서 찾는다. 『게르마니아』에서 타키투스는 명예로운 구성원들의 삶과 그 삶이 모인 국가는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가에 대해 서술한다. 로마와 적대하는 이방인들의 명예를 칭송하는 까닭은 그와 반대되는 로마의 불명예스러운 행태에 대한 처절한 대비효과를 위한 것으로 보인다.
타키투스는 로마에 항전하는 게르만족의 동력을 명예를 중시하는 풍토로 지적한다. 로마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세한 군세로도 그들은 결사항전을 감행했다. 게르만족이 두려워하는 것은 명예를 잃는 것이다. 예를 들어, 게르만족이 전쟁이 나면 부녀자들이 전쟁하는 곳이 보이는 곳에 올라가서 가슴을 풀어헤친다. 그리고 적군에게 애원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포로가 되어 빼앗기게 될 명예를 아군들에게 보여준다. 이를 보고, 게르만족은 명예를 배수의 진으로 치고 그 전쟁을 이기기 위해 결사항전을 감행하는 것이다.
이들의 왕은 선출제인데, 왕이 왕일 수 있는 이유는 왕이 왕으로서의 명예를 지키며, 모범을 보이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권위를 인정받는다고 한다. 타키투스는 로마와 달리 목숨을 바쳐서 항전하고, 일부일처를 지키고, 향락적 경기(콜로세움 검투경기)와 파티문화를 배척하는 게르만민족의 금욕적이고 용기를 추구하는 것을 예로 들어 그들의 명예를 칭송했다. 비록 이방민족이지만, 이전의 로마가 가지고 있었던 명예의 원형을 간직했기 때문으로 본다.
그런데 타키투스는 이방의 속주에서 발현하고, 여러 민족에 걸쳐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는 상반되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이 일파의 명칭의 유래가 된 크리스투스라는 자는 티베리우스 치세 하에 황제의 속리 폰티우스 필라투스에 의해 처형되었다. 그 당장은 이 해롭기 짝없는 미신이 일시 잠잠해졌지만, 최근에 이르러 다시 이 해악의 발상지인 유대에서뿐만이 아니라, 세계에서 마음에 안 드는 파렴치한 것들이 모두 흘러 들어오는 이 수도에서조차 극도로 창궐하고 있었다.
타키투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처형을 기술하면서 그리스도교를 1)해롭기 짝이 없는 미신, 2)마음에 안 드는 파렴치한 것으로 보고 있다. 타키투스가 가지고 있는 명예로움과 그리스도교가 추구하고 있는 명예에는 분명한 구분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미신이었던 까닭은 유다의 로마에 대한 반란과 그에 대한 진압과정에서 로마에 위해를 가하는 종교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책, 『일대기』에서 그리스도교인들이 네로에 의해서 화재를 일으킨 장본인들로 모함을 받았던 것이 중요하게 기술되지 않았던 까닭은 그의 관심사가 네로의 폭정에 맞추어져 있기도 하지만 그리스도교를 미신으로 본 영향도 있다. 네로의 폭정이나 그리스도인들의 미신이나 로마에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만약 타키투스가 그 미신을 로마와 주요도시에 전파한 바울을 평가했다면, 미신을 전파하는 불명예스러운 인물로 서술했을 것이다. 국가의 혼란을 조장하기 때문이다.
타키투스의 관점으로 바울은 기존의 유대인들에게 불명예스러운 자였다. 세계(그 당시 세계, 지중해를 둘러싼) 각 지역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바울은 그 지역에 퍼뜨려져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는 이단의 수괴였다. 40인의 유대인 암살자들이 바울을 죽이기 전까지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결의할 정도로(행23:12-13)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살해위협을 받았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로마군에게 요청하여 470명이나 되는 군사들로 호위를 받기도 했다. 암살 위험의 정황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취했던 신변보호요청은 타키투스에 의하면 결사항전하지 않음으로서 명예롭지 않은 행동일 수 있다. 자신의 주적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할 때, 사람을 모아 용감히 맞서 싸우는 것이 명예로운 행위인데,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을은 오히려 유대인들의 중심지,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죽기 직전까지 돌로 맞은 뒤에 피를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부형들아”(행22:1) 이는 적대했다기보다, 오히려 그러한 살해위협과 수치를 경험한 뒤에도 유대인들을 형제로 대했다. 그에게 있어서 명예로운 행위는 자기를 죽이려는 자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수치를 받더라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명예와 수치라는 도식으로 해석해볼 때, 바울과 실라는 복음을 위해서 민중(humilior)으로 취급되는 수치를 기꺼이 감내한다. 바울과 실라는 그들의 신앙적 결단 때문에 신분이 추락해서 수치를 당한다. 여기서 로마 시민권은 복음의 전달 매체로 수치를 명예로 반전시키고 있다. 그들의 명예는 이 세상이 제공하는 명예가 아니라, 하나님만이 허락하는 천상의 명예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고 고백했으므로(빌:3:20), 선교의 여정에서 세상의 시민권은 그의 관심에서 제외되었음이 명백하다
바울이 4차에 걸친 전도여행에서 그는 로마시민권으로 자신을 보호하기도, 혹은 그 시민권을 감추기도 하였다. 그 까닭은 그가 가진 명예는 타키투스의 관점과 상반되기도 하고, 가치를 공유하기도 했다. 그 예로, 타키투스가 게르만족의 노예가 없는 평등성을 명예롭게 본 것과 바울 또한 하나님 앞에서 누구나 평등하다고 보았던 것(빌레몬서 1:10, 노예 오네시모의 일화)은 공유되는 가치였다. 그러나 그 종착지가 로마였던 타키투스와는 달리, 바울의 전도여행의 종착지는 예루살렘도 아니고, 심지어는 처형당한 로마도 아니었다. 로마에 투옥되었을 경에 서바나(스페인) 지방으로 선교를 갔다. 서바나 또한 그의 종착지는 아니었다. 끝없는 정복으로 로마제국이 지경을 넓히는 것처럼, 바울의 명예는 예수 그리스도의 1)종, 2)사도로 부름 받아 3)선택을 입은 것이었고 이를 증명하듯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바울에게 있어서 로마인들이 명예롭게 생각했던 시민권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도구적 가치였다. 이미 그의 명예는 그리스도로부터 종, 사도로 부름받은 것으로 완성되었다. 물론, 타키투스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명예로운 삶은 바울 또한 지켜 행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다만, 타키투스에게 있어서 바울의 복음은 미신이었고, 로마사회의 명예로운 것을 좀먹는 것으로 보았다. 타키투스의 이러한 명예와 불명예 사이의 극명한 대비는 그의 역사서술의 특징이다. 그 특징으로 인해서 그리스도교는 미신으로, 바울은 그 미신을 전하는 이교도로 치부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로마의 몰락 이후로도 그리스도교는 그 담는 그릇의 모양대로 세계 도처에 ‘창궐’하고 있다. 그 동력은 무엇일까. 강한 힘을 가진 국가들이 국경을 넓히다 줄어들기를 반복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져갈 때에도 경계없는 무형의 그리스도교는 복음의 무력한 힘으로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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