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글라디우스와 예수의 검의 역사적 비교
: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Qui gladio ferit, gladio perit)
“지금의 전세계가 도대체 어떻게 되어 그리고 어떤 국가 체제에 의해 53년도 채 안 되는 기간 동안에 로마라는 단 하나의 패권으로 정복되게 된 것인가?”
폴리비우스의 역사가 묻는 중심질문이다. 그는 “역사 상 전례가 없는 대사건”으로 로마제국의 ‘전세계’를 정복했던 위업을 칭송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마케도니아의 그리스, 아프리카, 아시아의 인도에까지 이르렀던 대제국이 분명 과거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 상 전례없는 역사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테네, 스파르타와 같은 도시국가로 출발해서 다른 제국을 이뤄냈기 때문일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제국 또한 있었지만 그 출발이 이미 제국이었던 역사와는 다르기 때문에 이를 역사상 전례가 없는 대사건으로 기술하는 것이다.
또한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이뤄냈던 마케도니아 대제국이 로마의 정복으로 무너지는 것을 본 뒤였으므로, 역사의 흥망성쇠에서 ‘흥성’의 시기에 있던 폴리비우스는 로마의 이러한 대단한 업적을 칭송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폴리비우스의 통찰이 심오한 까닭은 로마 또한 ‘망쇠’의 내리막길을 걸을 수도 있음을 밝혀 적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카르타고의 장군 하스두루발이 스키피오에게 항복하는 역사적인 장면에서 관찰자로 있었다.
이 장면을 지켜보던 스키피오는 내게로 얼굴을 돌리면서 내 두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폴리비우스, 지금은 정말 영광스러운 승리의 순간입니다. 그러나 나는 언젠가는 우리 로마에게 이러한 불행이 닥칠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 집니다!’ 그의 이 말은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는 심오한 통찰력을 담고 있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승리의 기쁨과 적이 느끼는 패배의 아픔은 언젠가는 서로 반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물론, 폴리비우스는 서로 반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여 대비해야만 한다는 취지에서 이 말을 적은 것이다. 지금 자신들이 이긴 전쟁이, 로마의 칼인 글라디우스로 상징되는 로마의 정복이 멈추고, 정복하는 제국에서 정복당하는 패전국으로 돌아서지 않도록 그 날을 매일 갈아야만 한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서로마와 동로마로 나뉜 뒤, 서로마는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 황제 대에서 이민족 용병들과 고트족에 의해 점령당했다. 로마의 건국자인 로물루스와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가 모두 ‘로물루스’라는 우연의 일치로 흥망의 양면성이 역사적으로 증명되었다. 글라디우스로, 그 칼로 타국을 점령했던 로마가 다시금 그 칼에 의해서 멸망하는 모습은 ‘칼로 흥한자 칼로 망한다(Qui gladio ferit, gladio perit)’는 라틴어 격언을 기억나게 한다. 여기에서 칼을 의미하는 글라디오는 로마의 칼이었던 글라디우스가 어원이기 때문이다.
이 말의 기원을 단순히 라틴어 격언으로만 알고 있기도 하지만 예수가 그의 수제자 베드로에게 했던 말이다. 예수를 잡기 위해서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보낸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예수와 제자들에게 들이닥쳤다. “이에 시몬 베드로가 검을 가졌는데 이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요 18:10) 베드로가 칼을 뽑아서 했던 정당방위를 예수는 칼을 쓴 베드로를 이렇게 책망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눅 22:52)
여기에서 검은 로마의 검인 글라디우스와 같은 의미였다. 폴리비우스가 시키피오의 말을 받아적었던 그 의미와 통한다. 글라디우스라는 칼로 오와 열을 정비하여, 개개인의 힘이 충만했던 켈트족 전사들을 찔러 넘겼던 바로 그 검으로 망했던 것이다. 스키피오는 그렇게 되기 전에 로마라는 검을 날카롭게 갈고 정비해두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말했던 반면, 예수는 검을 가진 자는 “모두” 그 검으로 망한다고 말했다. 검을 쓰는 자는 필연적으로 그 검 위로 쓰러진다는 것과 검을 쓰면서도 쓰리지지 않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자는 말은 내밀한 의미로는 큰 차이를 보인다. 제국, 즉, 정복해야만 하는 국가정체성은 결국, 우로보로스( ουροβóρος)라는 뱀형상과 같이 자신의 꼬리부터 스스로를 먹어들어가는 꼴이 된다. 예수는 이러한 제국적인 폭력에 비폭력적으로 비판했다.
예수의 검과 로마의 글라디우스가 다른 맥락 하에서 쓰였다고도 반문할 수 있으나, 복음서 저자들이 쓰는 용어에서 로마의 용어가 짙게 뭍어 있고, 예수 또한 로마의 용어를 사용했다. 그것은 바로 로마 군단을 의미했던 레기온(legion)이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legion)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26:53) 군호를 맞추고 마치 로마 군대처럼 진군해왔던 이들 앞에서 이와 같이 로마의 군단을 의미하는 말을 한다는 것은 로마의 제국적 폭력에 대한 저항으로 보인다.
또한 거라사 광인에게 들어갔던 군대귀신을 쫓아내버린 사건 또한 로마의 제국적 폭력의 특성을 고발하는 의미로 읽기도 가능하다. 거라사(Gerasa)는 로마의 10대 도시(데가볼리, 데카폴리스)의 하나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이다. 근처에 질 좋은 철을 생산할 수 있는 철광이 있었던 곳으로 로마 제국의 속주 중에 아주 부유한 도시였다. 로마 제국의 정복전쟁에 철은 필수적이었다. 질 좋은 철을 제련하여 부러지지 않고, 날을 유지하는 글라디우스와 같은 검을 만드는 재료였다. 이곳의 번영하는 거라사의 광인은 무덤가에 살면서 돌로 제 몸을 상하게 하고는 했다. 이 광인에게 붙은 귀신은 레기온이었는데 이는 로마의 4천에서 6천에 이르는 군단을 의미했다. 거라사 광인이 로마의 압제에 정신이 온전치 못해진 이스라엘인이나 혹은 마귀에 들린 그리스도인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거라사 광인이 살고 있던 곳이 로마의 데카폴리스에서 가장 부유한 거라사였다는 점, 그곳이 글라디우스의 재료인 철광산과 가까웠던 점을 들어 그가 상징하는 바는 로마 제국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자기 스스로 몸을 상하게 하는 줄도 모르고 자해를 일삼는 모습은 검으로 제국의 지경을 넓혀가면서 결국 그 검으로 망하는 로마제국의 흥망성쇠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예수는 우로보로스와 같이 자기를 스스로 삼키는 폭력의 윤회를 지켜보고 그 윤회를 끊어내는 것은 도로 검을 집에 넣는 것뿐임을 가르쳤던 것이다. 검을 도로 그 집에 집어넣으라는 말은 베드로에게만이 아니라 로마제국에게 까지 적용되는 말이었다. 더 이상 다른 이와 제몸에 상처를 내는 검을 도로 집에 넣으라는 그의 말은 평화의 왕에 걸맞는다. 검이 있어야 자기를 보호하고, 제국을 넓혀서 번영하는 것이 당연한 시대에 그 검을 포기하라는 말은 오히려 분쟁을 일으켰다. 그래서 예수는 이렇게 역설적으로 말했다. “내가 평화를 주로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오히려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 검을 도로 제 집에 넣으라는 말, 그 가르침에 의해서 생길 분쟁을 예견한 말이다. 예수의 검은 검을 버리라는 가르침이었고, 그것은 분쟁을 불러왔으며 로마의 검은 제국적 폭력을 행사하다가 결국 그 검에 의해 사라졌다. 이제 이 시대는 예수의 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가? 그 검이 총으로, 핵무기로, 생화학무기로 오히려 더 공멸할 위험성이 커진 시대가 되었다. 우리는 어떻게 이 유용하고, 자기방어를 할 수 있는 검들을 포기하고 공멸하지 않는 평화의 시대를 열어갈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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