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물음에서 윤리물음으로
1. 존재 물음
데카르트의 철학의 원리나 스피노자의 에티카의 구조는 정의, 공의, 정리, 주석, 부록으로 이루어져 있다. 합리적인 원인과 결과의 순서로 나아간다.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활동시기가 30~40년 정도 차이가 나지만, 이러한 유사한 구조, 그리고 실체와 신에 대한 물음에서 데카르트의 합리적인 방법론이 그대로 스피노자의 글에서 등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스피노자의 에티카에 앞서 데카르트의 실체에 관한 물음, 즉 존재론에 관한 전반적인 이해가 선행되어야만 완전한 오독에서 불완전한 정독에 이를 수 있을 것 같다.
데카르트가 살았던 시대에는 교회의 사제나 종교인들이 초월적인 신을 받들어 모셔야만 하는 시대였다. 초월자인 신은 어떠한 물질적인 것보다 초월한 실체였다. 교회는 초월적인 가치(예를 들어, 천국)에 집중하도록 사람들을 이끌었다. 그러나 이 시대에 살았던 봉건 영주들이나 상인들은 초월적인 가치에는 관심이 없었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에 관심이 많았다. 이 때, 데카르트는 초월적인 것으로부터 인간이나 다른 사물이 나왔다는 그 당시의 사상을 거부하고 종교, 신학, 초월적인 신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사유할 수 있는, 혹은 존재할 수 있는 기반을 구성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 이는 데카르트의 명제이다. 모든 것들을 의심하고 난 뒤에, 즉, 모든 사유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무너뜨린 뒤에도, 모든 있다고 하는 것들을 부정하고 부정해도 ‘지금 의심하고 있는 나’는 의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무한한 신에게서 나온 유한한 인간인 나로 정의하였던 주체가 이제는 신으로부터 분리되어도 인식할 수 있는 주체가 된 것이다. 주체의 실존은 초월적인 신에 기반하지 않고 인간 스스로의 인식에 기반한 능동적인 주체로 자리매김했다. 이러한 능동적인 주체의 개념이 중세와 근대를 나누는 경계석이 되었다.
인식할 수 있는 능동적인 주체는 인식한다. 인식하는 주체에게는 인식되는 대상이 있다. 주체는 세상을 대상으로 인식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데카르트에 대해 비판할 점이 생성된다. 주체는 대상을 완전하게 인식할 수 있는가, 인식의 불완전함으로 인해서 대상을 오판할 가능성이 있다. 이미 우리가 어떤 대상에 대해서 인식, 즉 알고자 할 때에 우리는 그 이전에 선험적인 앎이 필요하다. 이미 사전 지식이 없는 한에 있어서 당면한 대상에 대한 문제에서 우리는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다. 오렌지주스를 한번도 먹어보지 않은 아기가 오렌지 주스라는 대상의 속성을 파악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오렌지주스의 맛을 경험하게 해주는 자가 있어야 한다. 인식하게 해주는 자가 있어야 하는데 끊임없이 이 인식해주는 자를 좇아 회귀하다보면 결국, 분리된 줄 알았던 그 신에게까지 이르고 만다. ‘신’은 전지전능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실체는 오직 하나이며, 그 실체가 바로 신이라고 말한다. 이 신은 전지전능한 신이지만 교회에서 말하는 인격적인 신은 아니다. 데카르트가 명백하게 정의하는 신이라고 부르는 실체는 자기의 속성에 존재를 포함하는 신이다. 다시 말해, 자기의 원인이 스스로인 신이다. 이를 ‘자기원인’이라고 한다. 실체인 신은 ‘무한한 것을 무한한 방식’으로 생산하다. 신은 자기원인이므로 무한히 생산할 뿐이다. 스피노자는 그들은 신에 대해서 편견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신이 무엇인가를 생산하기를 선택하여 생산하거나 하지 않거나 할 수 있다는 ‘자유원인’이 있음을 반박한다. 무한이 유한한 사물을 만들었다는 말로 신이라는 실체를 한정하는 것은 다시, 신이 무한하지 않다는 모순에 빠진다. 스피노자는 외적인 강제를 받는 자유, 생산을 제한하는 자유는 무한에 어울리지 않는다.
스피노자는 그들이 말하는대로, 신에게 어떠한 ‘의지’가 있어서 인간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거나 또 하지 않는 자기제한을 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고 말한다. 인간이 그의 생산하는 속성의 양태로 유한하게 이 세계에 등장했지만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신을 설득하여서 그 의지를(만약 의지가 있다고 가정했을 때) 강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합리적인 추론의 영향을 받은 스피노자는 인격적인 신은 ‘불합리’함을 증명한다.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신은 참으로 초월해 있기 때문에 인간의 의지로는 가닿는 것이 불가능한, 이 세계의 질서와 같은 류의 범신론적인 측면이 강하다. 여기에서 강한 것 같다고 말하는 것이 맞는 것 같지만 말이다.
2. 인간 윤리물음
인간이 신에게 기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스피노자는 그 것이 인간이 느끼는 감정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인간이 느끼는 감정을 스피노자는 욕망, 기쁨과 슬픔으로 한정한다. 그 외의 감정이라고 분류한 것들은 모두 이 세 가지의 섞임으로 이뤄진다고 말한다. 인간은 욕망한다. 만약 그 욕망이 좌절되거나 제한을 받으면 슬프고, 그 욕망이 이루어졌을 때 기쁨을 느낀다. 예를 들어, 배고픔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이 욕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밥과 간장만을 두고 먹는다면 그 사람은 배고픔을 면하였기 때문에 작은 기쁨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그 앞에 진수성찬이 차려진다면 그의 욕망은 크게 충족될 것이기에 큰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감정은 이처럼 욕망의 성취와 관련되어 있다.
인간이 만약 어떠한 이성적 고찰도 하지 않고 인격적인 신에게 이 욕망함을 충족시켜 달라고만 요구한다면 이는 선이 아니라 악이다.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선이란 우리에게 유익한 것임을 우리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악은 선을 소유하는 데에 방해가 되는 것이다. 감정에 휘둘리는 것을 스피노자는 ‘예속’이라고 하는데 여러 감정에 휘둘리는 것은 선이 아니다. 만약 감정을 이성으로 철저히 점검하지 않고, 그 감정이 이끄는대로 행위한다면 그 것은 악으로 발현할 수 있다.
여기에서 스피노자의 윤리론과 데카르트의 인식론이 나뉜다. 데카르트는 ‘주체’의 존재를 위해 인식론을 폈다면, 스피노자의 인식론은 철저하게 ‘우리’의 선을 지향한다. 이 선은 인식론에 기반한 선이다. 인간의 이성에 의하여 결정되는 욕망들은 항상 선하다고 하는 그의 증명이자 믿음으로 인식이 인간이 인생에서 얻을 수 있는 인간의 최고의 행복 또는 지복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 지복이라 불릴만한 지성은 신 및 신의 속성들 그리고 신의 본성의 필연성에서 나오는 양태들을 인식하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이야기한다. 아무리 인간이 그 지성에 도달하였다고 하더라도 신 앞에서는 겸손해야 함을, 객체를 인식했다고 해서 그 객체를 신과 같이 휘두를 수 있는 권리는 없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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