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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철학이 복음과 만나는 지점에 대한 본인의 성찰
_기독교 볶음이 만나는 지점, 볼보자동차와 노량진수산시장 사이
요근래 거의 매일 친구가 운영하는 카페에 출근했다. 코로나19를 핑계로 집의 소파를 데우는 것도 한계가 왔기 때문이다. 학부 때부터 친했던 J도 카페에 왔고 같이 앉았다. 대화를 나누던 차에 선배 H가 우리 자리 옆에 앉아서 간단한 안부를 서로 물었다. 나의 눈에는 명품스러운 그의 미소와 명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언뜻 보니 가방부터 옷, 심지어 핸드폰 케이스까지 모두 명품이었다. 전도사의 월급으로는 살 수 없는 물건들이었으니, 비트코인을 거래한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J를 보니 얹짢은 기색이 슬쩍 비치는 듯했다. J는 어릴 때부터 집이 가난하기도 했거니와 목회자는 청렴하고 검소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류였다. 그는 항상 낮은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현장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주의를 관철해 나가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 자리가 세월호, 촛불, 위안부, 세습반대집회, 노량진 수산시장으로 어디로든 “하늘나라가 너희 가운데 있다”(눅17:21)는 말을 “하늘나라는 너희가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기에 투신하고 있었다.
나보다 3년 선배 H는 설교대회에서 1등을 도맡아 했던 이였다. 윤동주의 서시를 복음과 연관지어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도록 복음의 길을 걸어가자”는 식의 설교를 했던 기억이 있다. 웬만한 설교들은 그제 먹은 점심밥이 기억나지 않는 것 같이 지나가는데, 그 해석의 참신함이 “망각했던 것을 떠올리게” 했다. 성적에도 꽤나 민감해서 각 교수님들에게 “이 과목만 A+를 주시면 장학금을 놓치지 않고, 학문을 이어나갈 수 있다”는 식으로 연락을 돌렸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의 집이 장사가 잘 되는 갈비집이었기 때문에 돈이 궁하지 않은 H가 원한 것은 장학금이 아니라 모든 과목을 A+로 받고 졸업했다는 일종의 자부심의 획득이었다. 현재는 유튜브 엔터테인먼트 회사에 취직해서 자비량으로 개척한 교회에서 담임을 맡고 있다. 대형교회에서 모종의 이유로 상처를 받고 교회에 나가지 않는 사람들과 새로운 공동체를 이뤄나가고 있다.
선배 H는 J의 신념과 그 삶에 대해서 긍정했다. 나에게 J에게 잘 보여 두라고 했는데 나중에 세습이나 부정한 일을 저질렀을 때 친구라도 J는 비판을 서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아버지가 어부라는 것을 그는 몰랐을 것이다. H는 그런 말을 하면서 자기가 J를 인정하는 몇몇 후배 중 하나라고 했다. 자기는 ‘할 수 없는’ 일들을 맞서며 해나가는 것이 대단하다고 평가했다. 그 자리에 있었던 나는 J의 눈치를 또 살폈다. 언짢은 기색이 얼굴에 스쳤다가 다시 평온해지기를 반복하는 J가 또 성미를 못 이기고 이 겉으로만 평화로운 대화를 파국으로 몰아갈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내게도 선배 H의 J를 인정한다는 말은 일종의 관용(Tolérance)한다는, 백인이 유색인종을 관용한다는, 서방국가가 개발도상국을 관용한다는 식의 그러한 뉘앙스로 들렸다. 그러나 그가 진심인 것은, 가끔 J의 활동에 선배 H는 후원금을 지원했으므로 J도 크게 화를 내진 않았으리라 본다.
이 둘과 교회란 어떠해야 한다는 이야기들을 나누었으나 그것은 그제 먹은 저녁밥 메뉴처럼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 스스로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서 교회란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고 나의 관심 밖이었기 때문이다. 복음의 전초기지가 교회라는 데에만 동의할 뿐 그 외의 것들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 둘이 때마침 각자의 약속이 있어서 함께 나간 뒤에는 안심했다. 부자와 빈자, 위를 지향하는 자와 아래로 정향하는 자 사이에서 위도 아래도 상관없다는 회색분자는 이들의 유머를 빙자한 날선 대화가 피곤했다. 그때 내게 필요한 것은 그들 나름의 숭고함의 각축이 아니라, 위든 아래든 그 무엇도 장식되지 않은 나만의 작은 서재, 내 마음속의 안식처였다. 그러나 그 안식을 J는 한통의 전화로 깼다.
이야기인즉슨, H의 차가 재작년에는 말리부였다가, 작년에는 BMW X시리즈였고 이제는 볼보 세단이 되어 있더라는 것이다. J는 H와 그의 차로 마침 방향이 같아서 동행했다. 그것이 왜 분노할 만한 사건인지, 고마워할 일이 아니냐고 했더니 더욱 그의 성질에 불을 지핀 꼴이 되고 말았다. 회색으로 있었어야 하는데 H를 옹호한 것으로 오해를 받았다. J가 분노한 것은 자기가 전도사로서 볼보자동차를 타는 것이 떳떳하다면 왜 볼보 자동차를 타는 걸 다른 사람에게는 알리지 말라는 얘기를 자신에게 하냐는 것이었다. 그 말에 J는 분노했던 것이다. 그건 그 사람의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말을 했다. 나쁜 짓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집이 부자인 것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 그가 가진 자금이 선택할 수 있는 차종의 범위를 넓혀준 것일 뿐. 자본주의 하에서 “재물은 모든 사람이 똑같이 가질 수 없고, 어떤 사람에게 흘러들어가면 나머지 다른 사람들은 궁핍해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가혹한 것이다.” 이 정도의 현실진단을 하자, J의 불은 더욱 거세어 이제는 실제로 만나서 이야기하자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낭패였다.
나의 말에 J는 그러한 가용한 선택지를 스스로 줄여서, 그 재물로 어렵고 낮은 이들에게는 돌아가게 할 수도 있지 않느냐, 이것이 예수의 삶이 아니냐고 말했다. 그래, 예수도 멋진 말을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수도 있었겠지마는 나귀를 타고 가셨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어떤 여인이 그 비싼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부었던 사건을 보면 또 다르다. 마태복음에서는 제자들 전체가 그 여인을 비난한다. 마가복음에서는 어떤 사람이 비난하고, 요한복음에서는 유다가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라고 외친다. J의 분노하는 지점과 일견 유사했다. 신기한 것은 그 여인이 부은 이유에 대해서는 제자들도 그 당시에는 눈치채지 못했다는 지점이다. 비싼 향유에 눈이 가면 그 외부에 있는 향유가 지닌 가치에 눈이 멀어서 향유보다 더 큰 가치의 것이 있다는 걸 알지 못한다. 예수는 그 여인의 뜻을 알았기 때문에 가만두라고 하며, 가난한 이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지속적으로 도우라고 했다. 그 향유는 예수의 장례를 미리 치루는 것, 십자가상에 달릴 사건에 대한 애곡의 의미였다. 보에티우스가 만약 그 자리에 있었다면, 예수의 중요한 가르침보다 향유를 아까워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이야기 했을 것이다. “너에게 속하고 네 안에 심겨진 좋은 것이 그렇게도 없어서, 너는 너의 밖에 있고 네게서 분리되어 있는 것들 속에서 좋은 것을 찾고 있는 것이냐.”
나는 회색분자이기에 J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노량진 수산시장 강제철거 상인들과 연대하는 것은 예수의 정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실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좀 더 네가 다른 방식의 연대로 시야를 넓혔으면 한다. 예를 들어, 저 H처럼 돈을 벌어서 그 영향력으로 그들이 이주를 반대했던 새로운 수산시장 임대료와 월세를 지원해주는 구체적인 방안도 있지 않겠느냐.” 이 말에 J는 만약, H가 볼보자동차를 끌고 와서 그 상인들 앞에서 내린다면 그 계층적 위화감에 연대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래서 말했다. 선배 H의 방식, 볼보자동차, 명품 등의 것들을 가졌다고 분노하지 말고, 그것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쓰지 않았다고 성내지 말고 그가 예수의 삶을 본받아서 하고 있는 자비량으로 꾸려나가는 교회를 보자. 교회의 여러 사건들로 인해 실망한 이들을 그러모은 것도 보라고 말했다. 너의 자리가 노량진 수산시장이라면 그의 자리는 일견 편해 보이는 볼보 운전석일지 모르나 태운 사람이 수십이다. 그곳이 모닥불을 피워서 고기를 굽고 앉아서 제자들을 기다리던 예수의 자리일 수 있다. 그 말에 J도 수긍하는 빛이 보였으나 그래도 그럼 안 된다는 말과 함께 나는 술집에서 풀려났다.
이 대화들을 나누면서, 선배 H와 J가 추구하는 숭고한 복음의 모양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손바닥 안에서 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같은 회색분자의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것을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이 살아가는 삶에서 치열하게 복음을 관철해나가려는 그 노력과 고뇌가 삶이라는 복잡성 속에서 뒤틀리고 엎어지며 나누는 대화가 값싸지 않았다.
누군가는 복음을 예수의 부활과 죽음, 그 사실을 믿음으로 받는 내세적 구원으로 단순화시켰다는 데에는 매우 유감이다. 단 하나의 진리를 말하는 그들이 스스로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주장하던 바로 그 부, 권력, 명예, 쾌락 등에 경도되어 넘어지는 사건들이 무수했다. “언젠가는 사멸되어 없어져 버릴 이 유한한 것들 속”에는 진리란 없다고 말하면서 왜 그들은 그 유한한 것들에 사로잡혀서 보에티우스가 말한 최고선이 주는 행복보다 우선시하게 된 것일까? 그것은 단 하나의 진리에 안주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 진리에 안주했기 때문에 불완전하고 복잡한 삶과 괴리되었다.
괴리가 발생하지 않으려면 볼보 운전석에 앉아서 핸들을 잡든지,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전경들의 멱살을 잡든지 자기의 삶에 터한 복음이 실현되어야만 한다. 철학이고 복음이고 거창한 것들, 그 거창함에 눌려서 아무런 해석도 하지 않고 그저 손을 놓고 진리이고 복음이라고 외치기만 하는 것이 문제다. H와 J의 각자의 복음의 자리에서 악셀을 밟든, 발로 뛰든지 그들 나름의 복음이 사람을 살린다면 그것이야말로 복음이다. 그래서 복음의 빛은 삶이라는 프리즘에 들어가면 복잡한 여러 빛으로 분광된다. 단 하나의 온전한 진리라기보다 복잡다단한 삶으로 끝없이 엮어 들어가는 일리들의 경합들로 꼴이 달라진다.
그래서 예수는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했다. 가르쳐 지키게 할 것은 “이웃 사랑과 하나님 사랑”이었다. 이 명령 앞에서 그리스도인 각자가 “어떻게”의 영역은 그 삶에서 일리 있는, 그럼에도 예수라는 가이드라인 안에서 서로 날선 대화들을 통해서, 실천을 통해서 벼려지는 에 세상의 검들이 되어갈 일이다.
그대 강한 자들이여, 이제 가라! 위대한 본보기가 인도하는 숭고한 길로. 어찌하여 망설이는가? 어찌하여 숭고한 길로부터 등을 돌리는가? 지상의 것들을 뛰어 넘어야만 별들이 주어지는 법이다._보에티우스<철학의 위안> 4권 7장
위대한 본보기, 예수 그리스도의 숭고한 길로 가는 H와 J는 또 언젠가 회색인 나에게 각자 찾아와서 서로의 욕을 할 것이다. 그것은 거의 반드시라고도 할 수 있는 예언이다. 그러나 이들이 자신을 복음에 갈아 넣는 것만은 틀림없다. 볼보의 운전석과 경찰차 뒷좌석 사이에 복음이 있다. 그들의 복음행보를 보면서 나 스스로는 너무나 정속주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조바심이 났다. 이 적절한 서두름으로 하루, 하루 철학과 복음을 쌓아서 타인들에게 허물어 내어주는 삶을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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