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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기를 주저할 만한 문제를 사랑하는 것.”(8) 이것을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는 고귀한 인간으로서 삶을 영위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우리가 생각하기를 주저할 만한 문제는 크게 두 가지의 이유가 있다. 타율과 자율. 타인의 강제로 인하여 그의 의지를 뚫지 못하여 문제를 사유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와 자신 스스로가 이 문제를 사유하기 복잡하고 어렵다고 생각이 들어 사유하기를 포기하는 경우이다. 이 두 가지 경우를 하나 하나 편의에 의해서 나누어 사유해도 되지만, 결국 이 두 가지의 경우에 부족한 것은 니체에 의하면 개인의 ‘의지의 힘’이기 때문에 타율의 주저하게 함과 자율적인 주저함은 결국 의지의 힘으로 타파할 수 있다. 니체는 남이 아무리 사유금지의 명령으로 내리더라도 그 명령에 항명하고 불복종하며 끊임없이 의지의 힘으로 사유를 밀고 나가는 것을 추구했다.
그에게 있어서 생각하기를 주저할 만한 문제는 바로 기독교였다. 니체는 기독교가 이 책의 ‘주된 테마’(17)라고 말했다. 기독교가 선이어서 악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가 악이기 때문에 니체에게 있어서 강하고 선한 인간을 오히려 악이라고 배척해왔다는 것이다. 니체에게 있어서 그리고 그는 이 문제를 권력이라는 관점에서 서술해나간다. 형이상학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독교라는 문제에 대해서 비판하고 성찰하게 하는 그의 사랑은 사디즘에 가깝다. 니체가 진정하고 유일한 기독교인이라고 불렀던 예수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서 성전에서 사고 파는 자들을 채찍질했던 것처럼 니체의 손에는 안티 크라이스트라는 채찍이 들려있다. 니체의 채찍질에 기쁨과 환희를 느끼는 기독교인이 있다면 이는 마조히즘이다. 나 또한 니체가 기독교를 철저하게 비판하는 이 책을 읽으며 완연한 희열을 느꼈으므로 마조이스트이다.
기독교를 악이라고 규정한 점에 있어서 가장 큰 희열을 느꼈다. 니체는 선과 악을 나누는 기준점을 권력으로 잡았다. 니체는 선이란 권력의 감정과 권력에 대한 의지, 권력 자체를 인간에게 오도록 증대시키는 모든 것이라고 본다.(14) 권력 자체를 인간에게 오게 하는 모든 수단들 또한 선이라고 본 점이 중요하다. 여기에서 권력 자체를 ‘나’에게로만 집중시킨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권력 자체를 인간에게 오게 한다는 것이 곧 그에게 있어서 선인 것이다. 니체에 대한 오해 중에 인간 중에 도태되어야 하는 인간이 있음을 이야기하지만, 결국 그는 의지의 힘으로 인간이 선함으로 즉, 권력을 모든 인간들 스스로가 공평하게 나누어 갖는 선함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기독교는 오히려 힘이 없음이 곧 선이라고 말한다. 니체는 이 것이 ‘악’이라고 말한다. 의지의 힘을 가지고 발전해 나가야만 하는 인간이 가치있는 권력에의 의지를 버리고 안주하고, 더욱이 스스로를 원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으로 비하하고, 삶의 가치를 이곳이 아닌 저곳으로만 두고 현실의 삶과는 유리된 삶으로 인도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한 니체는 기독교의 잘못은 강한 인간을 ‘악인’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권력에의 의지 없이 도당을 이루는 것은 악이 아니고 오히려 힘을 채우고 지속하고 축적하는 과정에 놓여 있는, 인간의 본능에 충실한(19) 선하고 강한 사람을 악으로 칭하는 것이 문제이다. 강하고 선한 사람을 악하다고 규정하는 기독교인들에게 니체는 ‘데카당스’ 즉, 의욕을 상실하고 허무주의에 빠져 적당한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니체의 이러한 기독교 비판은 진짜베기 삶이 아니라 가짜의 삶을 살아가고 있으면서 아무런 욕망도 없이 오직 신만 있으면 만족한다는 말로 자기위안만 일삼고, 신 이외의 것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인간을 끊임없이 악으로 규정하고 전체성으로 묶어 자기 동일화를 이뤄내려는 기독교의 특성을 파악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들이 자기 동일화를 시키기 위해 가장 잘 이용하는 것은 자신들이 섬기고 있다는 신인 ‘예수’이다. 진정한 기독교인은 한 명, 예수이듯이 그 외의 제자들부터 지금까지 모두는 예수를 오독하고 이용하는 집단일 뿐이다. 니체가 설명하는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모습은 초대 제자들이 자신들의 이해의 범주 안으로 밀어넣어서 축소시킨 예수였다.(72) 예수를 신앙하기 위해 그들은 보이는 대로 보지 않고 믿는 대로 보았다.
한 예로,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죽었다고 하지만 니체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방법을 가르치기 위해 죽었다고 본다.(80) 예수 자신을 희롱하고 겁박하고 때리는 사람들 앞에서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해를 가하는 그 사람들을 사랑했다. 이 삶의 방식은 단순히 인간들의 구원보다 더 가치있는 실행이었다. 니체에게 있어서 생각하기를 주저할 만한 문제를 사랑하는 것은 단순히 사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살아냄, 실행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예수는 니체에게 있어서 고귀함을 보여주는 인간이다. 그래서 니체에게 예수는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따름의 대상이다.
숭배는 내가 가닿을 수 없는, 혹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올라갈 수 없는 경지에 이른 이에게 향하는 것인 반면, 따름은 그 삶에 언젠가 이를 수 있다는 현실적인 지향점이다. 숭배는 인간이 완전성, 무한성이라는 이름을 붙인 신에게 하는 것이고, 따름은 유한성을 입은 예수에게 향한다. 예수를 따르지 않고 바울의 신학을 좇아서 기독교인이 하는 것은 끊임없는 자기로부터의 돌이킴, 회개이다. 죄인인 인간이 예수를 믿고 예수를 전하기만 하면 천국에 이를 수 있다는 단순한 논리로 인간들에게 죄악감을 심어주기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는 자신들이 본능대로 행하던 것들이 죄가 아니었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할 것들이 어느 순간 기독교의 관점에서는 죄로 규정되었다. 당연하게 해오던 것들이 죄가 되어서 앞으로도 당연하게 죄를 짓는 죄인으로 규정되었다.
교회는 인간에게 죄악감을 심어서 죄악감에서 해방시켜주는 통로를 자처했다. 교회 안에 들어오면 죄로부터 구원을 받고, 그렇지 않고 ‘세상’에 속해 있으면 죄인이며 적이 되는 구조로 나누었다.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교회 밖이든 교회 안이든 그러한 이분법에서 벗어나서 예수가 갔던 길을 걷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십일조를 내면 더 큰 복을 준다는 슬롯머신에 동전을 넣고 잭팟이 터지기를 기원하는 듯한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인앙이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모든 일이 형통한다는 설교에 사과가 떨어지기를 입만 벌리고 누워 있는 안일한 데카당스적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 니체가 나에게 준 큰 의미는 예수의 업적을 믿는다고 말하며 그 기류에 편승하여 선인인 채 하지 말고, 예수가 이뤄놓은 업적을 따라 나도 그러한 의지의 힘으로 달려나가라는 말이다. 진정으로 예수 안에 자유함을 누리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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