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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일요일에 예배를 마치고 같이 놀다보면 가끔 블록쌓기를 해야 할 때가 온다. 이미 어린 시절에 해보았기 때문에 나에게는 식상한 블록쌓기가 아이들에게는 성 시스티나 성당을 쌓는 일만큼이나 즐거우며 가치있는 일이다. 어린 시절에는 나도 그런 마음가짐으로 블록쌓기에 임했으니까 알 수 있다. 이 아이들의 진지한 표정을 보노라면 그 자신들의 부모님의 근엄한 모습이 보일 정도이다. 쌓다가 다른 놀이로 이동하면 다른 아이가 그 자리에 서 있는 성 시스티나 성당에 다가간다. 이 때, 아이들은 이 장엄한 건물을 그냥 놓아둘까? 이내 그 구조물을 철저히 철거하기 시작한다. 꼭대기에 놓여있던 블록부터 하단의 기반이 되는 블록까지 모조리 철거해서 다시 블록의 상태로 되돌린다. 그리고 그 아이는 블록들을 버리고 새 것으로 쌓는 것이 아니라, 다시 새로운 모양으로 형태를 잡아 나간다.
데이비드 흄의 철학적 회의론도 마찬가지로 쌓였있던 철학적 블록들을 모두 폐지하고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다시금 블록들을 재결성해보자고 하는 시도로 보인다. 흄은 기존의 철학자와 종교인들이 쌓아올렸던 인과론과 실체론의 개념을 비판하면서 오직 경험과 경험으로 발견한 사실에만 충실하고자 한다. 흄은 기존의 인과론과는 다른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기반을 두고 추론을 진행한다. 흄은 인과론이 원인이 있기 때문에 결과가 있다는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지 않는데서 논의를 전개한다. 이러한 원인과 결과가 ‘필연적’으로 이어진다는, 그 당시부터 지금까지도 당연하게 인식되는 것을 거부하고 비판한다. 우리가 인과론이라고 부르는 것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따로 떼어내야 한다. 원인이 되는 사건과 결과가 되는 사건을 관찰하면 오직 두 사건이 연이어서 일어난다는 사실만 포착할 수 있다. 이 사실들이 블록처럼 쌓여서 지속적으로 여러 번 경험될 때, 앞의 A사건이 일어났을 때, 뒤의 B사건이 일어남을 당연시하게 된다. 이 당연시에 딴지를 거는 것이 흄의 철학적 회의론이다.
흄은 이러한 당연시하는 사고, 그 관념 이전의 생생한 인상이 있다고 말한다. 흄이 말하는 인상은 생생한 일회적인 사건과의 마주침이다. 이 마주침은 희미하게 인간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데, 그 생생함이 현저히 떨어지는 관념이다. 흄은 이 관념이 유사성, 근접성,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따라서 사고할 때에 인간의 ‘이해력’이 작동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흄은 모든 인과론적인 철학적 사고를 버려야 한다는 극단주의자가 아니다. 철저하게 철학적 회의론자이다. 철학이 인간이 신에게 선험적 이성을 부여받았다고 하는 것을 인간의 이해력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 보고 비판한다. 특히, 인간만이 모든 만물 중에 특별하고, 인간이라는 결과를 낸 불변하는 일자인 ‘신’은 그보다 더 전지전능하다는 것을 논증하는 것은 도리어 그 논증이 발판이 없음을 증거하는 셈이다.
신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전지전능함은 먼저, 인간이 스스로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고, 그렇기에 전지전능에 대한 생생한 인상도 없을 것이다. 희미한 관념 또한 없을 것이 분명한데 그렇다면 전지전능은 인상도 경험도 아닌 관념의 단계에서 이뤄지는 아주 복잡한 관념들의 복합으로 볼 수 있다. 이는 프로이트가 신앙의 출발을 추장 아버지를 죽인 자식들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죄의식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자신도 자기 자식들에게 언젠가 살해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의 결합으로 본 것과 유사하다. 프로이트는 아들이 추장이 되었을 때, 자기 아들들이 자기를 살해하지 못하도록 ‘아버지 숭배’를 앞서 하였고, 이 것이 관습이 되어 종교로 발달했다고 본다.
그러나 흄은 프로이트와 달리 신을 옹호하거나 반대하는 논증을 펼치는 대신에 그 모든 논증들을 동시에 비판한다. 신은 논증으로 밝힐 수 없고 오직 신앙만이 신에게 다가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흄은 인간의 어떠한 신에 관한 논증도 신의 부재나 있음을 증명할 만한 기초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본다.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이 기적으로 종교체계를 유지하려고 시도하는데 이를 철저히 비판한다. 신이 기적을 일으킨다는 주장은 기적이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고, 자연의 질서에 반하는 것이라고 보았을 때,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지 않으면 기적이 아니게 되고(과학) 자연의 질서에 반하는 것이면 신이 스스로 지은 세계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이니(종교) 더욱 허용되지 말아야 할 것이 기적이다. 흄은 이렇게 신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관습과 경험에 너무나도 모순되는 것을 믿게끔 스스로를 결단하는 것이 곧 놀라운 기적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신은 없는 것인가? 흄은 인간이 논증하는 바로 그 신은 없다고 말한다. 흄은 연접하는 사건들을 여러 번 경험하면 우리의 정신은 관습적으로 앞의 사건을 원인으로 뒤의 사건을 결과로 여기는 버릇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 버릇으로 인해, 우리는 자연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을 관찰하고 그 뒤에 일어나는 사건을 미리 예상한다. 더 나아가 자연뿐 아니라 인간의 의지와 정신의 작용에도 동일한 양상을 갖는다. 어떤 한 사람이 이전에 어떤 사람과 유사한 성품, 상황, 성향을 대입하고, 이러한 행동을 하게 될 것임을 예상하기도 한다. 앞으로 이 사람이 할 행동을 미리 예측하는 것, 그리고 그 행동이 도덕적으로 옳지 않을 것이라 예상하고 미리 교육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본다.
흄이 보기에 종교인들이 연접하는 사건들에 대한 원인과 결과 나누는 버릇을 신에게도 적용한다. 흄은 신을 인간의 원인으로 보는 모든 논증들에서 보이는 잘못된 특징을 자신들이 결과라고 단정지은 것에서부터 원인으로 확대해나가는 논증의 방향에 있음을 꼬집는다. 원인과 결과로 규정하기 전에 이미 이 개별적인 사건들은 불가역적이고 일회적인 사건인데, 희미한 관념으로 원인과 결과를 묶고, 또 결과인 인간으로부터 신으로 좇아 올라가는 논증은 이미 신을 본 경험과 인상이 없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다. 이러한 가능하지 않는 논증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합리적인 접근보다 독단과 불합리함이 그 자리를 채운다. 독단과 불합리함으로 자신들의 논증을 믿고, 믿음을 강요하는 것으로 다툼, 분쟁, 더 나아가서는 국가 간의 전쟁까지 일어난다. 믿음이 문제가 아니라 불가능한 논증을 하려고 시도하는 그 믿는 방식에 흄은 이의를 제기한다.
이처럼 흄은 다툼의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해력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 한계 내에서 자신의 논증만을 믿고, 강요하는 독단적 믿음에서 철학자와 일반 대중을 해방시키고자 한다. 흄과 같은 맥락에서 미하일 바흐친은 정통의 믿음을 권하지 않는다. 정통의 믿음이란 결국 자기독백적인 교리일 뿐이기 때문이다. 고정되고 불변하는 정통적인 확실한 믿음은 타인과 대화하려는 태도를 가지지 못하게 하는데 이 또한 흄이 말한 독단과 일맥상통한다. 흄과 같은 맥락에서 바흐친은 종교인들의 믿음을 다르게 부르기 시작한다 ‘믿음의 감각’이다. 믿음은 고정되지 않고 거듭 선포되고, 언제나 고된 노고의 산물인데, 이 고된 노고는 항상 혼자가 아니라 대화로 타인과 만나는 것을 말한다. 또한 궁극적인 기독교인들의 믿음의 감각을 바흐친은 그리스도와의 대화라고 말한다. 바흐친의 믿음의 감각은 끊임없는 질문과 대답의 연속으로 항상 시대에, 상황에 따라 바뀌기 때문에 독단으로 인한 분쟁의 고통이 일상에서 이뤄지는 대화 중에 ‘참음’의 고통으로 대체된다.
흄과 바흐친의 연구는 일상을 파괴하는 관념적인 독단에서 벗어나 일상적인 삶을 유지하는 감각적인 대화로 나아가게 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일상과 괴리되어 있는 것, 일상보다 더 큰 가치가 관념적인 세계, 저 너머에 있다고 하는 믿음도 이들에게는 필요하지 않다. 일상을 천국으로 만들지 못하고 분쟁하게 하는 관념이 향하는 세계가 과연 그 천국일지, 바이킹들이 말하는 발할라일지는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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