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홉스는 자연상태의 삶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고 보았다. 홉스는 인간과 인간이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회를 자연상태라고 보았다. 여행을 갈 때 자신을 지킬 무기를 챙기는 것, 집이라는 공간에서 편히 휴식을 취하거나 잠을 잘 때, 문을 잠그는 것, 집안에 있는 귀중품을 금고 안에 넣고 잠가두는 것들이 자연상태에서 자신과 자신의 소유물을 지키려는 의도라고 본다. 다른 사람이 나의 것을 빼앗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서 이러한 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홉스는 내가 약하거나 방비를 잘못하면 그 틈을 비집고 자연상태의 타인이 내 삶을 송두리째 앗아갈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누구나 다 가지고 있음을 근거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이야기한다.
홉스는 이러한 만인의 투쟁에서 벗어나는 길은 자연상태에서 사회계약을 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 내용은 개인들의 ‘계약’으로 설립된 국가가 그 본래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절대권력(리바이어던)을 가지고 자연상태에 빠질 수 없도록 개인들이 계약을 지킬 수 있도록 감시와 처벌을 수단으로 삼아서 개인들을 다스려야만 한다고 보았다. 홉스의 이 두 개념에서 인간과 인간의 비대칭성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홉스의 자연상태와 사회계약이 진행된 국가에서 절대권력자와 시민 사이에는 비대칭성이 있다. 자연상태에서의 비대칭성은 고정되어 있다. 항상 타인은 나의 것을 빼앗으려고 다가오는 자로 공포를 느낀다. 내가 약하고, 타인이 강해서 내가 타인에게 폭력이나 빼앗김을 당하지 않기 위해 방비를 해야만 하는 상태가 있다. 그리고 국가권력이 있는 사회계약 국가에서 나와 타인은 함께 국가권력보다 약한 상태로 고정되어 있다.
사르트르 또한 홉스가 말한 자연상태의 인간의 비대칭성을 주장한다. 다만, 사르트르는 홉스와는 다르게 인간 사이에서 발생하는 권력관계가 항상 상승과 하강하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신체적 힘이 강했던 사람이 나이가 들면서 그 힘이 약해지면, 타인과 강함과 약함의 비대칭성이 역전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 비대칭성을 고정시킬 수 없다. 항상 우위를 점할 수는 없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이 비대칭성은 항상 움직이는 시소와 같다. 사르트르에게 삶을 산다는 것은 결국 이 비대칭성 위에서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는 일이다.
사르트르의 타자 이해방식은 레비나스와 다르게 역전 가능한 비대칭성이다. 사르트르에게 타자와의 만남은 헤겔적인 지향성으로 마남이다. 가닿는 타인을 지각장 안에서 대상화한다. 타자와의 만남이란 결국 사르트르에게는 지향성을 가진 두 주체가 서로를 대상화하려는 의식의 만남이다. 서로가 서로를 자신의 지각장 안에서 대상으로 규정할 때 두 의식이 맺는 과계는 ‘투쟁’일 수밖에 없다. 사르트르와 홉스는 관계맺음을 투쟁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같다. 사르트르와 홉스의 관점에서 일맥상통하는 점은 언제나 자신이 주인이고, 바라보는 대상이 노예 상태에 놓여있지 않다는 점이다. 주인-노예의 관계는 항상 역전가능하다. 사르트르의 의식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투쟁이나 홉스와 같이 사회, 국가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투쟁 모두 역전이 가능하다. 지각장 안에서 더 많이 파악한 자가 우위에 서게 되는 것과 사회 영역에서 더 많은 것을 타인에게서 빼앗은 자가 우위에 섬이다.
레비나스는 홉스와 사르트르의 나와 타자 간의 역전 가능한 비대칭성을 반대한다. 레비나스는 윤리적 비대칭성으로 나는 항상 타자보다 낮은 곳에 위치시킨다. 타자의 얼굴에서 비춰오는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 앞에서 나는 그 명령과 호소에 따라야만 한다. 타자에게 받은 명령은 거부하거나 자유롭게 책임을 선택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나는 타자의 얼굴에서 드러나는 낭패감, 고통, 슬픔, 분노에 선택할 수 없는 책임을 떠안는다.
홉스, 사르트르, 레비나스가 본 세계의 모습이 다르기 때문에 비대칭성에서 생각의 차이를 보이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사르트르는 말년에 레비나스의 윤리적 비대칭성을 인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벌어지는 현상을 홉스와 사르트르는 정확하게 분석했다. 정글과 같은 투쟁이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다. 레비나스도 투쟁의 상태에 놓여있는 세계를 수용소에서 경험했다. 레비나스는 윤리적 명령으로 투쟁의 상태를 벗어날 가능성을 열어주려 했다. 끊임없는 투쟁의 상태에 우리는 놓여있음에서 책임을 떠안음으로 서로가 서로를 지향성으로 실제적 행위로 약탈하려는 시도보다 서로의 윤리적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곧 이 투쟁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보았다.
현대에 이르러서 투쟁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저마다의 진리주장이 없어진다면, 투쟁이 멈출 줄 알았던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 더욱 투쟁이 일어났다. 서로가 다른 진리를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지만 결국, 푸코가 지적했듯이, 어떤 이익 앞에서 자신의 진리를 추구하고, 권력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저마다의 진리를 내세우는 또 다른 투쟁의 장이 열렸다. 이 투쟁의 장에서 홉스와 사르트르의 입장에 설 것인가? 혹은 레비나스의 입장에 설 것인가는 큰 고민을 안겨준다.
반응형
'책 Check > 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니체의 평등 (1) | 2024.11.29 |
---|---|
나카야마 겐의 <현자와 목자 : 푸코와 파레시아> (0) | 2021.01.31 |
미셸 푸코의 <임상의학의 탄생> (0) | 2021.01.29 |
데이비드 흄의 <인간의 이해력에 대한 탐구> (0) | 2021.01.28 |
프리드리히 니체의 <안티 크라이스트> (0) | 2021.01.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