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성, 잠금해제?’란 주제로 신촌의 창천교회에서 포럼이 있었다. 기독교 청년들이 가장 궁금해한 질문은 ‘혼전 성관계는 해서는 안 되는 행위인가?’였다. 이에 대해 총신대학교 이상원 교수는 “혼전 순결은 크리스천으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덕목이며 혼전 성관계를 했다면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 결혼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즉, 이상원 교수는 혼전 성관계는 죄임을 명백히 하고 있다. 결혼의 전인격적, 혹은 영과 육의 온전한 결합이 아니면 성관계는 단순히 쾌락을 좇는 죄로 보고 있다. 결혼 전에 갖는 성관계는 혼전 순결을 잃어버리는 행위이다.
잃어버림은 잊어버림과는 성격이 다르다. 잃음은 실체를 가진 것의 상실을 의미하며 잊어버림은 실체가 아닌 어떤 관념이나 생각의 상실이다. 혼전순결을 잃어버린다는 말은 이 점에서부터 실체가 아닌 것을 실체로 보려는 시도로 보인다. 순결이라는 관념을 실체로 보게 하려는 그 의도는 무엇인가? 한번 잃어버리는 다시는 찾을 수 없는 것으로서 소중히 생각해야한다는 강조인가? 왜 기독교는 혼전순결을 지키고, 잃어버리면 안 되는 지극히 귀한 성으로 가치를 드높인 것인가?
오리게네스는 인간의 신체를 영적 진보를 위한 전쟁터로 본다. 그는 결혼과 성관계는 이 싸움에 부정적이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성과 속, 영과 신체라는 플라톤의 이분법적 철학이 스며들어왔기 때문이다. 인간의 신체는 일종의 영을 속박하고 있는 감옥이었다. 플라톤은 신체를 언젠가 썩어지는 불완전한 것이지만 그 안에는 영원불멸하는 영혼이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리게네스는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죄에서 벗어나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로 예수로 보았다.
오리게네스는 예수가 처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예수는 신체적인 욕망의 충동에 의해 수태된 자들로부터 죄를 계승받지 않은 순결을 가졌다. 이 순결함은 결국, 플라톤부터 출발한 이분법, 더러운 신체와 신체로부터 비롯된 욕망을 하등한 것, 더러운 것, 신으로부터 멀어진 죄로 보았다. 그리하여 욕망을 금지함이 곧 순결함으로 연결되었다. 최초로 오리게네스는 마리아의 처녀와 금욕을 연결시킨 장본인이었다. 오리게네스 이후의 처녀는 금욕적이고, 곧 죄가 없으며 더 나아가 순결하다고 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욕망과 계승되는 아담의 원죄를 연결시켰다. 인간이 자신의 욕망 때문에 하나님에게 불순종하고, 그 욕망이 신체에서 신체로, 즉, 자손으로 대대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정욕이 성관계로 이어지고, 성관계를 통해 자식이 태어나므로, 정욕이라는 원죄는 대대로 이어진다.
수도사들은 이 끊임없이 지속되는 죄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 자신의 스승인 사목자에게 모든 사항에 대해 고백하는데 이 고백의 기술이 엑사고레우시스이다. 수도원에서는 신체적 금욕 뿐만 아니라 정신적 금욕까지 요구하고 이것을 고백을 통해 점검받는다. 이 고백의 기술이 수도원에서 차츰 기독교 전체로 퍼져 나가서 ‘회개’라는 엑소몰로게시스가 되었다. 공적으로 이 이상의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죽음과도 같은 치욕을 견뎌내며 자기를 희생하면서 자기의 진실을 말함이었다.
푸코는 이 두 가지 고백에서 기독교인의 자기고백의 통찰을 얻었다. 서양 사람들은 성적인 자기 고백을, 성적인 자기 욕망을 해석하고 진정한 자기가 어떠한지 고백하는 행위를 했다. 자신의 가장 내밀한 죄를 신부(father)에게 고해함으로 자신의 욕망을, 그 욕망의 결과인 행위를 자기를 해석하여 발설함으로 인해 각자의 내면에서 발생하는 욕망이 제각각 다름을 알게되고 그것이 바로 성적 주체의 탄생이었다. 이 성적 주체는 자기를 해석하여 고백한다.
그런데 현대 한국교회의 양상은 다르다. 고백을 받아주지 않는다. 순결함은 죄의 고백으로 깨끗하게 되는데, 이 고백을 사람이나 회중이 아니라 하나님께 올리라고 한다. 죄를 자복할 때에는 사람들에게 이 것이 진실임을 드러내며 죽음과 같은 부끄러움을 견뎌낼 필요가 없는 고백을 한다. 이 자기고백에는 자기를 해석할 동기가 있을까? 특히, 성(생물학적 성, 사회적 성)을 이야기할 수 없는 침묵을 강요한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자복하라며 불편한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는 주체와 진실을 들어주는 대상은 하나의 쌍이어야 한다. 진정한 자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대상들의 집합체가 만약 현대 한국교회의 모습이라고 한다면 어떤 성적 주체가 그 안으로 들어가려 할까?
이미 성관계를 맺은 성적 주체에게 자기해석을 들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교회 내에서 이미 마련해놓은 이상적인 성도의 조건에 부합하지 않음으로 공동체 내로 유입해 옴을 막는 일이 빈번하다. 그래서 이 공동체 내로 들어오는 성적 주체들은 자신을 해석하여 고백하지 못하고 침묵한다. 이 침묵이 교회의 사목통치자로서 해석의 여지를 주지 않는 것으로 비춰지지만 실상은 교회가 말하지 못하게 하는 매커니즘이다. 교회에 들어오려면 성적인 이야기는 침묵해야만 한다.
침묵하는 교인들 앞에서 사목통치하는 목사나 전도사는 발언의 권력을 갖는다. 침묵과 발언 사이에서 통치가 발생한다. 침묵은 복종을 낳고, 발언은 통치를 낳는다. 다수가 침묵하는 공간에서 목사나 전도사가 설교하는 그 주제 안에는 성적인 타락에 대한 이야기만 있지, 성적 주체들이 파레시아, 자신의 전 삶을 걸고 고백할 공간은 없다. 그 자리에 앉아서 해야만 하는 것, 혹은 하지 말아야 되는 것만을 듣는다. 자기 해석이 아니라 사목통치자의 발언에 자기를 형성해야 한다. 결국, 그 완성은 순결하여 죄가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기 인데, 순결이라는 가치 아래에서 예수 또한 침묵하게 한다. 성경의 예수는 술을 먹는데, 현실의 신자들은 술을 먹으면 안 된다. 순결한 예수는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지만, 예수는 창기와 세리들과 어울렸다.
그 안에서 성과 관련한 행위가 있었다, 혹은 없었다를 이야기할 순 없다. 다만, 성과 결합된 죄, 욕망이 그 사귐에서 없었다고 보긴 어렵다. 창기는 성적 욕망을, 세리는 돈을 향한 욕망을 가진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욕망과 어울렸다는 기록은 예수가 성적 욕망을 품었다거나 돈을 욕망했다라는 뜻이 아니다. 다만, 예수가 성과 속, 영과 육, 성과 순결 등의 이분법적 사고를 하지 않고 그들과 어울렸다는 뜻이다. 예수가 성을 더럽게 여기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만약 한국 교회가 강박적인 ‘순결’을 향한 욕망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갈수록 신도를 잃어가는 이 사태는 지속될 것이다. 이분법적 사고로 순결한 교회와 성적인 세상을 나누는 한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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