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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Check/철학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의『말과 사물』

by 스파르탄 2021.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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닮음과 다름 

: 미셸 푸코의 『말과 사물(LES MOTS ET LES CHOSES』

 

  1. 들어가는 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는 『말과 사물』이라는 제목을 통해서 어떤 의미를 독자들에게 말하고 있는가? 제목이 내용을 대표한다. 이 전제는 푸코가 해체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제목의 의미를 생각해보았다. 『말과 사물』이라는 제목에서 말과 사물의 관계에 대한 글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푸코가 서론에서 밝혀 적었듯이 이 글은 ‘하나의 문화가 사물들의 근접을 터득하는, 친근성에 관한 도표와 이 친근성을 검토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질서의 확립 방식을 관찰하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언어가 사물과 사물 사이에 ‘닮음’의 기준으로 확립되어가는 방식을 연구하고 있다. 사물들 사이에 분류 체계를 확립하고, 그 분류 기준에 따라서 닮음을 산출해내는 방식에 대해서 르네상스, 고전, 근대의 에피스테메를 추적하여 설명하고 있다. 사물의 닮음을 결정하는 질서는 결국엔 언어, 즉 말이다. 말로 사물을 분류하고, 닮음과 다름을 정하고, 그 닮음과 다름으로 권력이 작동하는 원리를 푸코는 『광기의 역사』와 『말과 사물』에서 포착했다. 

  이 글에서는 먼저 푸코가 말하는 계시와 언어 사이에 있는 유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두 번째로는 인간과 사물의 관계에서 인간이 사물이라는 범주 안에 들어있음을 이야기하려 한다. 마지막으로 닮음과 다름이 혼란하게 뒤섞여서 인간이 소외되는 세계에서 벗어날 가능성에 대해 고찰해보고자 한다.    

     

 

2. 계시와 언어

 

  언어는 일반적으로 어떻게 의미가 명확해져 가는가? 책을 쓰는 과정과 유비해보면, 음절이 모여 낱말을 이루고, 낱말은 모여서 문장을 이룬다. 문장들이 모여 문단을 이루고, 문단들이 모여 몇 개의 장이 되고, 그 장들이 모이면 책이 된다. 음절일 때 드러나지 않았던 의미들이 낱말이 되어 사물을 지시한다. 이 낱말들이 문법의 체계로 이해가 가능한 형태로 모이면 문장이 되면서 품사들이 모여 더욱 투명한 의사표현이 이루어진다. 더 나아가 한 문장으로 의미전달이 부족하다고 느낄 때, 각 주어나 혹은 목적어, 동사에 대한 부연설명이 들어가면 점점 더 의미가 명확해진다. 이렇게 한 책을 출판했을 때, 의미는 명확한가? 의미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많은 말을 했을 때, 그 복잡성으로 인해 의미는 불투명해진다.    

  푸코는 16세기의 실제 언어를 설명하는데, “언어는 거울처럼 사물을 반영하여 특이한 진실을 하나씩 표현할 독립적이고 획일적이고 매끈한 기호들 전체가 아니라, 오히려 불투명하고 불가해하고 자체적으로 닫힌 사물, 즉 철저하게 수수께끼처럼 파편화된 덩어리로서, 여기저기에서 세계의 형상들과 섞이고 뒤얽힌다.” 라고 말한다. 푸코는 16세기의 언어는 사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사물인 언어는 사물과 매끈하고도 아름다운 한 질서의 기호로 묶이지 않는다. 푸코는 “신이 인간에게 언어를 주었을 때, 본디 언어는 사물과 유사했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확실하고 투명한 사물의 기호였다.”고 말한다. 강렬함은 호랑이의 두 눈에, 생명은 얼룩말의 다리에 연결되어 투명하게 사물과 연결지어져 있었다. 이 단순하고 매끈한 연결은 신의 인간을 향한 징벌인 바벨탑 사건으로 극적인 전환을 맞는다.

  본래 가지고 있었던 아주 단순하고, 일차원적인 기표와 기의가 한 가지 묶음으로 뭉쳐서 기호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언어는 사물과 같이 다양한 질서들에 의해서 불가해한 파편이며, 이 파편들은 사물과 완벽하게 대응되지 않았다. 언어는 파편화되어 널브러져 있고 섞이는 사이에 투명한 연결성을 잃게 되고, 해독이 쉽지 않은 계시가 되었다. 그래서 푸코는 언어를 ‘파묻힌 계시임과 동시에 점증하는 빛 속에서 조금씩 다시 드러나는 계시’라고 보았다. 명확하게 사물과 구분되어 사물의 의미를 명확하게 파악해나갈 수 있는 투명함은 이제 사라지고, 언어가 복잡하게 얽힘에 따라서 파묻혀진 의미를 파악하려고 끊임없이 시도해야 하는 계시가 되었다. 

 

 

3. 인간과 사물 

 

  사물은 계시를 해석할 수 있는가? 사물은 물건이기 때문에 계시를 해석할 수 없는가? 인간은 사물의 분류 안에 들어가지 않는가? 이 세계의 모든 것이 사물이므로 인간은 사물의 분류 ‘안’에 있다. 그러나 인간은 사물의 분류에서 자신을 교묘히 빼낸다. 사물이라는 낱말을 인식할 때에 자기 자신은 따로 사물보다 더 상위에 분류한다. 포유류는 새끼를 낳아서 젖을 먹여 기르는 동물들의 분류다. 인간이 포유류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포유류의 분류 안에 들어가지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나 외의 것을 사물이라고 부르고 나와는 다른 것, 혹은 나보다 열등한 것으로 보는 이러한 관점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언어와 사물 사이에서 생겨나는 의미의 복잡성, 그 계시를 해석할 수 있음이 인간이 사물의 분류에 들지 않는다고 전제했다. 그러나 푸코가 이야기하는 사물은 단순히 물건만을 말하지 않는다. 이 세계에 있다고 우리가 분류하고 체계 안에서 동일성과 차이를 나눌 수 있는 인간도 포함한다. 푸코식으로 사유하면,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거의 모든 사물에 대한 절대적인 권위는 사라진다. 인간인 사물이 사물들을 담론으로 해석한다는 것이 신으로부터 받은 절대적인 능력이 아니다. 인간이 사물들의 사물로 편입되어 그 공간에서 자신을 위치시키는 일이 중요한 이유는 사물들을 소외시키거나, 혹은 배재시키려는 시도를 사물이라는 동일성 안에서 시도할 수 없이 되기 때문이다. 다른 인간이 나와 다르기 때문에 혹은 같기 때문에 배재하려는 모든 시도들을 봉쇄하기 위해서 ‘나’도 모든 사물의 공간 안에 있는 사물이라는 자각이 필요하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 아니라, 담론을 해석할 줄 아는 한낱 인간사물일 뿐이다.

  푸코는 17세기와 18세기의 에피스테메를 해석하여, 언어를 ‘인식이고 인식은 당연히 담론’으로 보았다. 16세기의 계시가 17세기와 18세기에는 담론이 되었다. 인간이 신적 언어로 내려진 계시를 해석하는 과정은 언어를 해석하는 인식의 과정과 같다. 그리고 이 해석들이 모여서 하나의 성서를 이루듯이, 인식들이 모여 담론을 이룬다. 담론은 여러 인식들이 모인 지식이 층층이 쌓여서 형성된 지층이며 동시에 그 지층을 분류해내는 질서이다. 즉, 지식의 지층이자 지층을 스스로 분류할 질서의 역할을 하는 두 가지가 담론이다. 이 담론의 성분이자, 질서인 언어와 인간 사이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4. 닮음과 다름

 

  언어와 사물 사이에는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사물인 인간과 언어 사이에도 의미가 있다. 이 ‘사이’는 공간이다. 16세기 이전, 혹은 바벨탑이 무너지기 전, 투명성을 지닌 사물에 직접 지시된 의미와 달리, 16세기 이후의 사물의 의미는 불투명하고 복잡해졌다. 그리하여, 언어가 직접 사물에 대응되지 않고, 언어와 사물 사이에 의미가 자리를 잡고, 해석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의미를 알 수 있게 되었다. ‘A는 B이다’라는 서술은 16세기 이전에는 단순한 개념이었다. 17-18세기 이후에 A와 B가 같을 수 있는 조건은 A와 B가 담론을 통해 분류되어 같은 공간 안에 배치됨이다. 그 반대로 『광기의 역사』에서 각 시대별 에피스테메로 발견할 수 있는 ‘다름’은 다른 공간에 배치한 결과이다. 이 분류와 배치는 인간 사회에서 작동하는 인간소외의 원인이다. 

  『광기의 역사』에서 이성과 광기의 이분법이며, 이 의미공간을 이분화한 결과일 뿐이다. 권력이 담론으로 광기를 가졌다고 여겨지는 인간을 배재하였다면, 『말과 사물』에서는 이 의미공간에서 오히려 광기를 가진 인간에게서 ‘닮음’을 발견하려고 시도한다. 본래적으로 이성과 광기의 공간이 나뉘어 있지 않았다. 단지, 역사적으로 권력이 선택한 담론에 의해 분류되고 배치되었을 뿐이다. 배치된 의미공간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때, 말과 사물을 바라보면 인간은 바로 그 닮은 사물이 된다. 나와 다르면 소외되는 것이 당연한 세계에서 나와 다른 사물임에도 불구하고 닮은 사물임을 깨닫게 된다. 나와 다르지만 닮은, 닮았지만 또 다른 인간을 의미공간에서 배재하지 않는 세계를 열어갈 가능성을 볼 수 있다. 

  이 세계는 다름과 닮음이 혼란스럽게 뒤섞이는 공간이다. 광대는 왕이었다가, 거지였다가, 아낙이었다가 가면을 끊임없이 뒤바꾸는 광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대는 왕일 때는 왕과 닮았고, 거지일 때는 거지와 닮았고, 아낙이 빨래하는 모습을 똑같이 묘사한다. 이 모든 닮음에도 불구하고, 광대는 그들이 아니지만, 그들과 닮아있다. 이 혼란스러움, 가면을 바꿔드는 그 행위에 나와 다르지만 닮은, 닮았지만 다른 인간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다. 나의 얼굴에 다른 이의 얼굴을 덧씌워서 내가 너가 되는 것, 그리고 너가 나이게 하는 이 공간에서 나보다 못한 자, 망한 자, 외면할 자는 없다. 너를 외면하면 가면을 쓴 나를 스스로 외면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면을 쓴다는 것은 내가 나와도 다름을 의미한다. 내가 나였다가, 내가 아니었다가를 반복할 때, 내가 타인을 규정할 수가 없다. 내가 변화하고 있는 중심, 기반, 질이 달라지고 있는데, 어떤 기준점을 두고 나와 다르다, 닮았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곧, 규정할 수 없게 된다. 타인을 규정할 가능성이 사라진 세계에서 타자를 배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열린다.

  

 

5. 나가는 말

 

   16세기 이전까지의 언어와 사물 사이는 해석할 공간이 없이 맞닿아 있었다. 바벨탑이 무너지듯이, 16세기에 해석의 공간이 열렸다. 언어와 사물 사이에 신의 계시를 해석함이 다양하듯이 다양한 해석이 매끄럽지 않고, 거칠게 놓이게 되었다. 끊임없이 해석해야만 그 가려진 공간에 빛이 들어차듯이 계시로서의 언어가 드러난다. 그리고 나는 이 언어와 의미를 사이에 두고 있는 사물에 인간도 포함된다고 주장하였다. 인간은 언어로 사물을 해석하는 입장에만 서있는 것이 아니라, 해석되는 입장에도 서 있다. 이 해석함과 해석됨의 긴장 속에서 인간은 타인을 소외시키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해석의 긴장 속에서 닮음과 다름이 권력에 의해 분류와 배치되었을 뿐, 진리가 아니라는 주장을 하였다. 닮음과 다름은 분류하기 나름이다. 인간이 소외되지 않는 세계는 광기를 가두거나 이성을 중시하는 세계가 아니라, 닮음과 다름이 혼란스럽게 섞인 세계이다. 이 세계 안에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더욱 해석이 난해하여 결국, 서로를 닮음으로만, 다름으로만 규정할 수 없게 된다. 이 규정할 수 없음이 곧, 소외시킬 가능성을 없앨 수 있다.

  지금 한국 사회는 혼란하다. 세월호 침몰 사건 이후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까지 혼란스러운 정국은 정리되지 않고 지속되고 있다. 5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미국의 북한 압박과 전쟁이 임박하다는 유언비어 속에서 확실한 것이 없다. 그러나 확실하게 이 쪽과 저 쪽을 나누는 분류하기가 어려울수록 타인을 규정하는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시기이다. 학연, 지연, 혈연과 같은 닮음에는 다름으로, 소득격차, 주거지, 정당과 같은 다름에는 닮음의 요건들이 혼란스럽게 얽혀서 한 사람 한 사람을 완벽히 해석하고, 규정가능하다는 것을 포기하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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