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디 브라운(Wendy Brown)은 이 책의 핵심 질문을 이렇게 제기한다. “관용이란 무엇인가?”, “관용의 핵심은 무엇인가?” 따위의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21) 브라운은 관용을 정의하는 데에 힘을 쏟지 않고 오히려 관용 담론이 작동하는 방식을 추적하는데 힘을 쏟는다. 브라운은 관용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어떤 초월적이고 보편적인 개념, 원리, 원칙, 미덕이라기보다는, 목적과 내용, 행위주체와 대상에 따라 다양한 역사적, 지리적 변형태를 가지는 정치적 담론이자 통치성(governmentality)의 실천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22) 다시 말해, 이 책에서는 관용을 독립적이고 일관된 원칙이나 실천으로 이해하기보다는, 강력한 수사적 효과를 가진, 역사적 문화적으로 특수한 권력담론으로 분류한다. 브라운은 ‘통치성의 실천으로서 관용’이라는 표현으로 공식적으로 약자를 보호한다는 목적을 넘어서 은밀하게 정치, 문화, 사회적인 효과로 관용이 작용하고 있음을 밝힌다.(31)
그래서 몇몇 학자들이 태도나 덕목으로서의 관용(tolerrance)과, 실천으로서의 관용(toleration)을 구분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개인의 윤리로서의 관용과 정치적 담론이자 통치성으로서의 관용으로 구분한다. 개인적인 윤리로서의 관용 행위는 주체를 암묵적인 규범에 종속시키는 권력의 매개 역할을 하기도 한다. 관용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관용 행위를 통해 그 자체를 통해 비정상, 주변부, 바람직하지 않은 것 등으로 표지(mark)되기 때문에 관용하는 자와 관용받는 자 사이에 권력차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브라운은 관용을 개인적인 윤리로, 도덕이나 덕목으로 개념화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관용이 정치적 담론이자 통치성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인정하게 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개인의 윤리로서의 관용으로만 보게 하려는 시도들, 그 콩깍지들을 벗겨내는 일이 필요하다.
브라운은 이 문제를 ‘관용의 탈정치화’라고 보았다. 탈정치화란, 불평등, 종속, 주변화, 사회갈등 같이 정치적인 분석과 해결책을 필요로 하는 문제들을, 한편으로는 개인적인 문제로,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적, 종교적, 문화적인 문제로 이해하려는 시도를 말한다.(39) 이 탈정치화의 공통된 방식 중 하나는, 정치현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 그 현상이 등장하게 된 역사적 배경과 그 현상을 조건 짓는 권력의 문제를 배제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정치적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여야 할 때, 정치적 언어를 감상적이고 개인적인 언어들로 대체해버리는 방식이다.(42) 전자는 정치적 문제의 원인을 탈정치화하는 방식이며, 후자는 정치적 문제의 해결을 구조적인 부정의나 불평등의 문제로 보지 않고, 개인의 고통에 대한 감상 수준으로 대체해버리는 방식이다. 두 가지 방법 모두 관용이 정치와는 무관하다고 보는 시각을 심어준다.
일반적으로 관용은 인간적 차이 혹은 “다른 의견이나 행동”에 대한 존중으로 정의되는데, 이는 모호한 정의이다. 관용은 단순히 그 것의 정의가 모호한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모호함을 실천에까지 이끌고 간다. 오늘날 관용은 종교, 문화, 종족, 인종, 성적 규범과 같은 통약 불가능한 주제와 실천들을 그 특유의 모호함으로 뒤섞어 버린다. 브라운은 그 한 예로, “아랍계 미국인”과 “무슬림”을 동의어처럼 사용되고 있음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중동문제에서 팔레스타인 상당수가 기독교인이며, 몇몇 이스라엘인들은 소수지만 아랍인이라는 사실을 망각시킨다. 이러한 혼합은 ‘정치의 문화화’이다. 즉, “모든 문화는 어떤 실체적 본질을 가지고 있으며, 정치는 그러한 본질이 표현된 결과”라는 입장의 확산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상(symptom)이다.(47) 정치적인 갈등을 문화라는 엄밀하게 정의된 것이 아니라 단지 종족적으로 표지된 이들의 각종 실천과 믿음을 뭉뚱그려 뒤섞여 있는 것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과거 냉전 시대에는 정치적 갈등이 이데올로기의 문제로 환원되었다면, 탈냉전 시대에 모든 정치적 갈등은 문화의 문제로 환원된다. 즉, 문화는 다양한 체제와 사람들을 구별해주는 기준이자 정치적 행위의 원일 넘어, 해독제로서 자유주의를 필요로 하는 하나의 “문제”로 구성된다.(49)
자유주의가 내세우는 원리인 보편성과 문화의 특수성이라는 반대의 원리를 갖는 것으로 본다. 뒤 이어,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의 극대화를 중심 기획으로 내세우고, 문화는 집단의 결속과 연속성을 강조하며, 상호 적대적임으로 보인다. 이를 토대로 자유주의는 종교를 개인화하고 사적인 것으로 여기며, 자유주의 하에서 종교와 문화는 사적일 때에만 관용의 대상이 된다.(50) 자유주의는 문화가 가지고 있는 공동체성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기 때문에 문화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도록 감시하는 경찰과 같은 역할을 스스로에게 지위를 부여한다.
그러나 브라운은 자유주의는 문화적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소위 ‘문화의 권력’이라고 부르는 구성적인 동시에 억압적인 권력-즉, 주체의 선택이나 동의 없이 주체의 사회적 관계와 실천, 믿음, 합리성 등을 생산하는 권력-이, 자유주의에 의해 일소될 수 없으며 자유주의 자체에 이미 이러한 권력이 내재함을 의미한다(52) 문화적으로 억압받고 있는 개인이 있다고 여기고, 자유주의적인 해방을 해야만 한다는 자율성, 보편성에 대한 믿음은 가변적이다. 문화라고 부르는 모호성과 마찬가지로 자유주의 또한, 모호하게 여러 규범들과 결합하여 존재한다. 예를 들어, 희잡을 두른 여성을 억압하는 문화에서 해방해야만 한다고 하는 것은 고려하는 자유주의가 미국 여성의 가슴축소와 확대, 코의 높이 조절은 개인의 자유가 잘 지켜지고 있다고 보는 ‘믿음’의 일관성 없음을 들 수 있다. 희잡을 두른 여인은 개인의 자유로 두른 것이 아닌가? 미국 여성은 사회적 미의 기준에 부합하기 위해, ‘미인’은 어떠해야 한다는 그 기준에 맞추기 위해 억압당하는 것은 아닌가? 관용은 자유주의가 문화적이라는 것을 들키지 않게 하기 위해 문화를 자유주의의 적으로 삼는다. 자유주의의 적으로 정의되는 문화적 정체성(차이와 관련되기에 비자유주의적, 본질적이기에 비정치적) 간의 충돌을 규제하기 위한 자유민주주의의 도구로 기능한다. 이 과정에서 관용은 정체성 주장 및 정체성 간의 충돌을 탈정치화하는 동시에, 스스로를 단지 양심의 자유나 정체성의 자유를 보장하는 도구로, 즉 어떤 규범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자유주의적 통치의 도구로 내세운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정치적 풍경을 폭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54)
자유주의의 문화적 속성을 인식하는 것은 자유주의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자유주의 내에 있는 혼종성(hybridity)을 보여주려 한다. “온전히 자유주의적인” 자유주의는 불가능하며, 자유주의의 내용과 형식은 언제나 역사적이고, 국지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데 그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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