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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Check/철학

지그문트 바우만 외,『거대한 후퇴』(The Great Regression)

by 스파르탄 2021.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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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들어가기 

 

  거대한 것은 위대하다. 덩치가 좋으니까 책임감이 있어 보인다. 타이타닉호는 가장 큰 배이기 때문에 안전할 것으로 보인다. 거대한 것에 대한 우리네가 기지고 있는 인식이란, 어느 정도 크기까지, 혹은 얼마나 용도에 맞게 큰가에 대한 생각이 없이 크다는 것은 일단 좋다고 보는 인식과 연결되어 있는 듯하다. 나 역시도, 연세대 뒤에 있는 안산보다도 알프스의 거대함에 압도되었고, 덩치가 컸던 탓으로 사람들에게 책임감을 강요받았던 때가 있었다. 그래서 거대함과 부정적인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거대한 후퇴』(The Great Regression)이라는 제목은 긍정적인 형용사와 부정적인 명사가 만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왜 거대한 후퇴일까?

  이 책의 머리말에서 하인리히 가르젤베르거는 거대한 후퇴를 “사회 ‘문명화’ 단계에서 특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는 현상들이 발생할 때” 거대한 후퇴의 전조 증상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해일이 오기전에 밀물과 썰물의 경계가 항상 명확했다면, 어느 한 순간 썰물이 평소보다 뒤로 후퇴했을 때, 우리는 해일의 전조로 볼 수 있다. 브렉시트, 트럼프의 당선, 유럽국가의 난민 수용거부 등의 세계적인 문제들은 세계화에서 위기를 맞은 신자유주의와 그에 따른 반동인 시장 근본주의 현상이다. 냉전시대의 이념으로 갈라졌던 세계가 이제는 ‘문화의 차이’ 혹은 ‘국가주의’라는 장벽을 쌓고 있다. 38선이 그어졌을 당시에는 자유롭게 남북을 오가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휴전선이라는 명목하에 철망이 쳐지고, DMZ가 생겨난 뒤에 갈라졌던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모든 현상에 대해서 지그문트 바우만은 우선, 이동의 시대가 왔음을 이야기한다. 두 번째로, 이러한 이동으로 인해서 불관용하는 시대가 되었음을 밝힌다. 마지막으로 이 불관용이 우리와 그들을 나누는 시대가 되었다고 이야기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화라는 희망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2. 이동의 시대

 

  지그문트 바우만은 세계화 시대의 이주와 이동에 대해서 설명할 때, ‘도착한 국가’에서 사회심리적 조건의 속성에 의해 좌우된다고 말한다.(43) 이 때, 세계화된 국가들에 대해서 바우만은 ‘공통의 용기’라는 표현을 쓴다. 유기화학 실험실의 수많은 용기들과 거기에 연결된 관들에 의해 용액들이 이동하는 것처럼 경제와 정보의 세계화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이 이 용기들로 이주하고 이동한다. 

  움베르토 에코는 이주와 이동을 구분한다. 이주현상은 “정치적으로 관리되거나, 제한되거나, 장려되거나, 계획되거나, 수용된다.” 그러나 이동은 이주와는 다르다. 이동은 이주와는 다르게 주객이 전도된다. 국가 내에 수용되어 있는 국민의 의사와 상관없이, 혹은 정치 권력을 잡고 있는 소수의 권력자들과 관계없이 다른 색의 용액들은 용기 안으로 이동한다. 움베르토 에코는 이 용액의 침투에 대해서 질문을 던진다. “지구 전체가 사람들이 교차 이동하는 영토가 될 때, 이주와 이동을 구분할 수 있을까?” 필자는 이 질문이 현대 사회가 가지고 있는 ‘모호성’을 대변하는 질문으로 느껴졌다. 이주는 통제가능하고, 이동은 통제가 불가능한데 결국에는 이 두 가지가 뒤섞여 있는 상태가 될 것이다.

  학교 등교를 할 때, 정문으로 들어가는 학생이 있는 반면 담벼락을 넘거나, 철망으로 된 학교 밖과 학교 안에 이른바 ‘개구멍’을 만들어서 통행하는 학생도 있다. 더 재미있는 학교 안으로 들어오는 방법은 이전에 학교 뒷산의 등산로를 타고 와서 교사 뒤편으로 들어오는 방법도 있다. 통제가 불가능한 이러한 학교 내로의 이동의 예는 국가로 확대시켜놓아도 같은 방식일 것이다. 학교의 학생주임 선생님과 몇몇 선도부 학생들은 교문 앞에 서서 대다수의 이주를 통제하고 있는 줄 알고 있으나 실상은 그들이 지키고 있지 않은 쉬는 시간 등에 학교 밖으로 간식을 사먹는 등의 용무를 보기 위해 오가는 학생들이 많다. 에코는 이렇게 말한다. “유럽이 이주로 취급하고 있는 것은 사실 이동이다.” 이 사실은 유럽이 난민들의 유입을 좋든 싫든, 국가에 이익이 되는지, 되지 않는지를 판단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강구한 뒤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급격하게 용기 내로 쏟아져 들어오는 다양한 색의 물결이다.

  그렇다면 이주와 이동을 나누는 기준은 무엇일까? 이주는 통제 가능하고, 이동은 통제 불가능하다는 것은 국가 내에 있던 사람들의 관점이다. 국가 밖에서 흘러온 사람들에게 이주와 이동의 차이는 ‘우리가 저들과 동화되느냐, 동화되지 않느냐’에 달려있다. 바우만은 이렇게 서술한다. “이주 개념에는 동화가 고유하게 존재하는 반면, 이동 개념에는 명백히 동화가 부재한다.” 주체와 객체의 구분에서 객체의 반란으로 볼 수 있다. 그 이전까지는 국가 내에 있는 자들에게 결정권이 있었다. 냉전시대에는 이데올로기라는 편리한 장치로 국가 밖과 안을 첨예하게 나누고, 국가 안에 있는 주체와 국가 밖에 있는 객체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었다. 심지어 영토의 한계를 넘어, 다른 국가의 영토에 거주하더라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이념이 같다면, 국가 ‘내’에 있다고 여길 수 있을 만큼 명확했다. 

 

 

3. 불관용의 시대

 

  그러나 에코가 말한대로 모든 용액이 영토라는 용기 내에서 뒤섞여버린 지금, 주인과 손님의 구분이 사라졌다. 그리고 ‘우리’가 등장했다. 좋든 싫든 국가 내에 본래 있었던 이들과 국가 내로 유입된 사람들은 우리로 묶였다. 좋든 싫든 이 이동에 의해서 우리는 날마다 ‘차이’와 더불어 살아가야만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바우만이 ‘문화적 이질성’(46)이라고 이름붙인 차이는 수많은 상호작용과 마찰이 동반됨을 의미한다. 문화의 충돌현상을 이야기하는데, 이러한 혼종의 가능성을 인정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에 정체성 차이에서 ‘부정’이 발생한다. 이 부정을 에코는 불관용(intolerance)으로 본다.(46) 에코가 말하는 불관용은 어떤 원칙보다 우선적으로 적용되는 성격을 갖는다. 에코는 불관용을 ‘자연적인 것’으로 여긴다. 동물들이 자신들의 영역에 들어온 다른 동물을 쫓아내는 텃세 등으로 말한다. 

  과연 불관용은 텃세로 보아야 하는가? 불관용은 단순히 우리가 그들과 다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인가? 나와 다른 차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대하여 단순한 감정적 불편함에서 비롯되는 부정인가? 웬디 브라운은 자신의 책, ‘관용’에서 ‘관용은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차이를 만든다’고 말한다. 에코는 불관용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차이 원칙이 통제되지 않는 불관용을 낳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차이 원칙이 불관용을 이용한다.”(47) 관용은 차이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관용하기 위한 차이를 탈정치화하고 문화화하기 위해 만들고, 또한 불관용은 이렇게 만든 차이들 중에, 불관용하는 자들이라 낙인 찍은 자들에게 허용되는 일종의 ‘배제하며 수용하기’이다. 

  왜 이동하는 대상들에게 배제하며 수용하기가 동시에 이뤄지는가? 바우만은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말한다. 다른 곳에서 이동해 온 자들은 이방인이기 때문에 우리 영토 내에서 나고 자란 자들은 잘 알지만 이방인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두려워한다고 말한다. 그 이방인들이 어떠한 일을 벌일지 모르는 그 사실이 기존의 터를 닦고 사는 사람들을 두려워하게 하고, 불관용하게 하고, 차이는 불관용의 근거로 만들어진다. 알지 못하는 것에서 머물러서 차이를 상상한다. 동일성을 상상하지 않는다.       

  한국사회 안으로 들어온 조선족에 대한 처우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우리는 이방인에 대한 불관용하려는, 차이를 생성하여 근거로 삼으려는 시도들을 본다. 근래에 한국에서 개봉한 영화 중, ‘청년경찰’과 ‘범죄도시’에 등장하는 조선족들은 한국 사회에 들어와서 무자비한 폭력을 일삼는 무리로 나온다. 청년경찰에 등장하는 조선족들은 어린 여성들에게 과배란하게 만들어서 그 난자를 병원에 납품하는 잔학성을 보여준다. 범죄도시에 등장하는 조선족들은 가리봉동에서 잔학하게 서로를 죽이고 이권을 차지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한국인과는 다른 조선족이 가지고 있는 ‘잔학성’이라는 차이 때문에 우리는 조선족을 불관용하려는 태도를 가지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차이를 조장하는 것은 관용과 불관용의 문제를 탈정치화 우리 한국인은 영화와 같은 친숙한 문화를 도구로 하는 ‘문화화’한 결과이다. 이 문화화는 결국, ‘보이지 않게 통치하기’의 일환이다.

 

 

4. 우리와 ‘그들’의 시대 

 

  푸코는 중세의 통치는 ‘생사여탈의 통치’로 보았다. 군주의 말을 들으면 살고, 듣지 않으면 사형인 권력이었다. 그러나 이 생사여탈의 통치가 군주시대에서 공화정으로 넘어오면서 ‘살게 하는 통치’로 바뀌었다. 이 통치는 죽이고, 살리는 통치가 아니라 영토, 안전, 생명으로 교묘하게 관리하는 통치이다. 이 통치는 죽이지 않고, 살게 내버려두는 것처럼 보인다.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고, 살 권리를 유지시켜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부에는 통치가 있다. 사목권력이 통치하는 성도들이 통치받는 줄 모르도록 통치하는 것처럼 국가도 국민이 자신이 자유롭다고 느끼도록 통치한다. 신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해주는 것은 각 개개인의 존엄성을 지킨다는 명목을 내세우며 그 적인 근본주의적 공동체성을 해체한다. 공동의 법은 해체되고 각자가 가지고 있는 양심에 따라 이성적으로 행위한다면 그러한 개인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신자유주의는 모든 사람에게 각광을 받았고, 세계가 서로를 관용하는, 즉, 차이를 넘어 연대한다는 의식을 공유하게 했다. 유럽연합의 탄생이 바로 이러한 의식에서 나왔다. 이 세계에서 이주는 통제하려고 하지만, 이동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자신의 논리를 따른다. 신자유주의의 태동은 세계화로 영토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이동을 허용하게 했다.       

  현재, 트럼프의 당선과 브렉시트, 세계기후협의회에서 세계화가 전지구적인 문제라고 제기되었는가? 세계화는 각각 나누어진 영토를 기반했던 냉전시대 때에 각 국가의 문제였다. 소비에트 연합의 경제문제는 미국의 경제문제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자국의 경제는 비록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하더라도 큰 영향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냉전이 끝나고,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에서 다국적 기업이 등장했다. 다국적 기업은 영토라는 한계를 넘어서 이 나라와 저 나라를 자본으로 연결했다. 이 연결고리들이 지역적인 문제를 세계적인 문제로 확대시키는 계기였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일어났을 때, 아무도 집값이 내려가는 것에 대해서 1년여 동안 누구도 알아채지 않았다. 여러 은행들이 도산할 때에야 비로소, 이 모든 일들이 자본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실감했던 것처럼, 트럼프의 당선은 우리에게 세계화에서 다시, 국가주의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세계적인 문제에서 미국은 장벽으로 세우고 빠져서 자국의 이익만을 수호하겠다는 이 명쾌한 선언에 미국 내의 여러 보수주의자들이 격렬하게 호응한 결과, 트럼프는 당선되었다. 

  바우만은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을 ‘우리’와 ‘그들’로 나누는 것은 역사상 인간의 생존 방식에서 불가분한 특징이었다.”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를 관용했던 세계화의 시대에서 피해를 받는 것은 ‘우리’이고 이익을 얻는 것은 ‘그들’이라는 이 논리로 자국민들을 무장시킨다. 더 나아가 이익을 못 얻는 우리의 피해는 고스란히 그들이 주는 것이 되고, 피해를 주는 그들은 열등하고 구제불능이며, 폭력적인 자들이 된다. 이들에 대해서 이해해보려고 하는 시도들은 점점 적어진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이해란 계속 나아갈 방법을 아는 것’으로 보았는데, 결국, 미지의 다른 나라의 사람들에 대한 이해하려는 시도, 즉, 계속적인 시도가 없음은 이해할 수 없음이다. 불가해하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 사실로 국민들에게 각인되면, 이는 그들과 우리를 나누는 장벽으로 작용한다. ‘사자’는 언제 우리를 해칠지, 우리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자를 우리에 가두어 놓는다. 이러한 인간과 짐승 사이의 경계짓기와 같이 그들 또한 짐승처럼 문화의 장벽을 친다.

 

5. 나가며

 

  우리는(여기에서 ‘우리’는 그들과 우리를 나눈 뒤의 우리가 아니라, 우리와 그들을 함께 통칭하는 말로 쓰인다.) 어떻게 다시, 우리로 돌아올 수 있는가? 다양한 문화의 차이가 본질적인 원인이라고 보는 시각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 시각을 바꾸기 위해 바우만은 프란체스코 교황의 말을 인용한다. “우리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통해 대화의 문화를 촉진해서 사회구조를 재건해야 할 소명이 있습니다. 대화의 문화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타당한 대화상대로 보게 하고, … 배제가 아니라 포용의 전략을 창안할 능력이 있는 문화를 물려주게 될 것입니다.” 

  다문화라는 차이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힘의 장벽을 쳐야만 한다는 논리에 반대하여, 차이가 있기 때문에 대화할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바우만은 프란체스코의 대화로 현재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을 단숨에 해결이 가능하다고 보지 않는다.(57) 다만, 그는 우리가 ‘익숙해져 있는 방식’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대화의 방식으로 점진적인 해결을 해보자고 제언한다. 그리고 이 점진적인 해결에는 엄청난 인내가 필요함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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