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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Check/철학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의 『신의 죽음, 그리고 문화』(Culture and Death of God)

by 스파르탄 2021.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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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hankyung.com/society/article/2018043056197

 

  지난 7월 외할머니가 8년여의 긴 투병생활 끝에 돌아가셨다. 동생이 전화했을 때에 나는 ‘초등생 살인사건’의 공판이 열리고 있는 인천지방법원을 막 나오던 참이었다. 두 공범 중 한 명이 초등생을 유인하여 죽이고 그 사체 중 일부를 다른 공범에게 전달하는 등, 사건의 내용이 기괴했다. 인터넷의 한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사람을 죽이기로 공모하고, 아무런 이익도 없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아서 그 공판에 참석하기 위해 갔다. 그러나 그 자리에는 천여명의 사람들이 공판에 들어가는 제비를 뽑기 위해 앉아있었다. 공판에 들어가기 위해서 제비를 뽑을 때, 자신이 가진 제비가 뽑히자 활짝 웃으며 환호하는 모습들에 다시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한 어린 아이의 죽음에 이토록 다양한 분노, 환희, 좌절, 기쁨 등의 감각들이 교차하는 것을 보았다. 나의 제비는 뽑히지 않았다. 그래서 안도했다. 왜냐하면 나의 내면에 있는 환희나 기쁨의 감정이 한 아이의 죽음 앞에서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오자마자, 두 번째 ‘죽음’인 외할머니의 소천 소식을 들었다. 

  외할머니의 소천 소식을 듣고 제일 처음 속에서 느꼈던 감정은 안도감이었다. 아, 이제는 우리 어머니가 8년간의 긴 병수발에서 벗어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그 동안 수없이 많이 연습해왔던 생각이었기 때문에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 이후에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들이 몇 가지가 떠올랐다. 마지막에는 결국 안도감만이 남았다. 장례를 치르는 기간 동안, 외할머니의 소천 소식을 듣고 달려온 친척들의 울음 섞인 위로들 사이에 나 홀로 안도감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을 하니 나의 인간성을 제비뽑힌 기분이 들었다. 친족이 죽었음에도 너무나 담담하고 차분한 마음으로 3일을 보냈기 때문이다.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의 『신의 죽음, 그리고 문화』(Culture and Death of God)을 볼 때에도 담담하고 차분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믿는 신이 죽었다는데 아무런 미동도 없는 나의 믿음이 까발려진듯한 기분이 들었다. 신의 실재를 믿고, 믿는 체계를 가진 종교, 교회 안에서 성장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신이 죽었다는 책 제목에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교회에서 이 책을 읽고 있는 나를 보고 동료 전도사가 성도님들이나 담임목사님이 제목을 못 보시게 다른 데서 읽으라고 할 정도였다. 그 정도로 이 책의 제목이 목사님의 눈치를 봐야할 정도의 불온서적급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불경한 제목의 책을 다른 기독교인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읽어야만 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을 만큼, 평범한 제목으로 읽혔다. 책의 표지에는 흰색과 빨간색의 대비를 두어 무언가 ‘금기’시 되었던 부분에 대해 폭로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 의도로 보였다. 특히, 원제를 그대로 번역하면 ‘문화와 신의 죽음’일 것을 신의 죽음을 앞으로 가져온 의도는 다분히 강렬한 느낌을 주려는 의도로 보인다. 시각과 생각, 즉, 감각과 이성을 연결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책은 이글턴이 서문에서 설명한 것처럼 이 책의 내용은 ‘신이 사라짐으로 인해 발생한 위기에 대한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5) 책의 표지는 한국의 여러 종교종사자들, 종교비판자들 양 측의 상상력을 동원하게 하여 결국에 이 책을 사게 만들려는 목적을 갖는다. 신이 죽었다는 것은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 또한 신의 존재를 믿지는 않지만 사회적인 도덕, 질서를 위해서는 무지한 믿음이나 이성적이고 고상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까지도 책 내용을 읽어보고 싶게 만드려고 의도를 갖고 있다. 결국, 강렬한 색감과 ‘신의 죽음’이라는 제목을 경험한 사람은 이 책을 펴 볼 수밖에 없다.  

  이글턴은 이와 같이 ‘이성과 감각을 연결하는 것을 미학의 역할’이라고 보고, 삶을 지배하고 무질서한 영역을 줄여 일정한 논리를 이끌어내는 일을 하는 것이 그 역할이라고 말한다.(94) 미학은 어떤 예술에 대한 논리적인 정리를 하는데, 이는 낭만주의가 예술로 신의 자리를 대체하려고 했던 시도가 실패하고, 낭만주의가 주도했던 시대에서 관념주의로 넘어면서 이성이 감각을 정리하고, 분류하여 인간 개개인이 느낀 감각을 서로에게 알기 쉽게 논증해준다는 희망을 보았다. 낭만주의자들이 주창한 예술은 감각적인 것으로 종교적 믿음이 이미지와 상징을 통해서 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또한 신이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그 진리에 따라 숭고한 삶을 살아야만 한다고 하는 종교적 믿음으로의 순환을 대체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글턴이 지적한 바, 예술은 소수적 성향이 강하기 때문이다.(78) 

  종교적 믿음은 이미지, 상징을 사용하여 다수에게 신을 보여주고, 그 보여진 신은 자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보여준다고 믿게 한다. 그 것은 사람들 개개인이 상상하는 신이 아니라, 어떤 교리로 정해진 이미지들이기 때문에 다수가 공통의 믿음을 소유하는 일이 가능했다. 이 것이 종교적 믿음으로 삶을 살아가는 순환이 되었다. 신이 그렇게 살지 않으면 벌을 준다, 지옥에 간다, 이렇게 살면 복을 받는다, 천국에 간다는 말로 인간의 행실을 제어했다. 그러나 예술은 각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이지, 전체의 이미지로 취합되기에는 개개인의 상상이 너무나 자유로웠다. 괴테에 의하면 상상력은 분열된 능력, 창조적 에너지의 원천인 동시에 공포와 망상의 근원이다.(135) 상상력은 통합적이라기보다 그 자유로움 때문에 분열적이다. 그래서 예술인들의 상징, 이미지들은 소수에서 다수로 넘어가기 전에 분열하고, 종교가 다수에게 미치는 영향력에 미치지 못했다. 

  이 때, 미학이 등장했다. 소수의 감각을 다수의 감각으로 공유시키기 위해서 저마다가 다르게 느끼는 감각과 그에 따른 자기표현과 이성을 접합했다. 그 이유는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는 데 있었다. 이글턴은 자기표현과 이성이 미학적으로 최상의 균형이 반드시 이뤄저야 한다고 말한다. 자기표현이 상상력의 특징인 분열적인 특성만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상호간에 자유롭게 인식행위를 할 때, 이 분열적인 욕망은 고양된다. 쇼펜하우어는 예술은 욕망의 죽음이라고 정의했다.(128) 여기에서 욕망은 각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저마다의 상상력이 그 원천이다. 내가 추구하는 가치와 당신이 추구하는 가치가 있을 때, 이 가치들은 충돌한다. 그러나 예술은 이 가치의 충돌을 미학적 균형을 통해서 훌륭하게 제어한다. 저마다가 가지고자 하는 욕망의 열정에서 냉정으로 순환하게 한다. 이 순환을 통해서 예술은 타인과 싸워나가기 보다 공존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자기표현과 타인의 표현 사이에서 미학적 균형을 이루는 것이 바로 도덕률이다. 이 도덕률은 그래서 예술적,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 안에 이성적인 금지나 규범들을 포함한다.

  이 도덕률의 토대는 최상의 균형이다. 최상의 균형을 ‘선’으로 본다면 선은 종교적으로 말하면 신의 절대성과 이어진다. 신의 절대성은 어떤 피상세계의 상황 하에서도 선을 이루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최상의 균형을 가지고 인간을 다스린다. 인간은 신이 자신의 삶에 맞는 최상의 것을 준다고 믿기 때문에 그 말씀에 복종한다. 만약, 그 것이 신을 믿는 각 개인들 저마다의 삶에 최상의 균형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면, 신은 신이 아니다. 그리고 그 절대성은 추락한다. 낭만주의의 최상의 균형은 신의 절대성을 대체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이글턴은 이 시도가 실패했다고 보았다. 이는 마치 ‘북극곰을 생각하지 말라’라고 스스로에게 계속 말하는 것과 같다. 북극곰은 없어, 북극곰은 흰털이 나 있고, 북극곰의 앞발은 무시무시한 힘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나는 그 북극곰을 생각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되뇌이지만 결국에는 북극곰은 스스로의 상상력 속에서 생생하게 생각이 된다. 이처럼 신을 믿지  않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다. 근대성(모더니티)이 무신론을 마침내 어떠한 반대에도 굴하지 않고 16세기, 17세기를 지나 18세기 무신론자가 등장할 수 있을 정도로 보편화한 ’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무신론은 종교적 믿음이 틀렸다고 주장하거나 이 믿음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해서 얻은 것은 아니었다.(155) 만약, 종교적 믿음이 틀렸다고 주장할 수 있는 발로가 있다 해도 그 것은 신학의 한 방법인 ’부정‘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이 부정은 신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신은 어떠하다, 라고 긍정하기보다 신은 어떠하지 않다고 하는 신학이다. 무신론이 신에 대해서 부정신학적 방법으로 성취되었다면, 그 것은 신이 실재하든지, 실재하지 않든지 신을 향한 믿음을 틀렸다, 맞았다고 할 수 있을 만한 기초가 없다. 기초는 이미 신학에서 신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이글턴은 신이 실재하는 것에 대해서는 유보적이다. 리차드 도킨스와 같이 신의 실재를 부정하는 작가들에 맞서서 신을 옹호하는 책을 펴냈지만, 이글턴은 신의 실재 유무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이글턴은 마르크스주의 문학비평가로서 유물론적이지만 그 안에서 신을 믿는 종교의 역할을 이성, 예술, 이성과 예술의 결합, 근대성, 탈근대성, 이 모든 것이 합쳐진 문화조차도 그 어느 것도 종교의 역할을 대체하지 못했음을 이야기한다. 이글턴은 세상에는 너무 심하게 믿는 자들과 너무 믿지 않는 자들로 양분된다고 말한다.(248) 이 세상에는 자신이 신을 믿지 않는다고 고백하는 사람이나, 신을 간절히 믿는다고 하는 종교인들도 있지만, 이들이 엄밀한 의미로 신의 실재를 믿는 것인지, 신의 자신을 향한 역할을 믿는 것인지는 한번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이글턴은 마키아벨리, 니체와 같이 강렬한 인물들의 종교에 대한 관점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마키아벨리는 종교적 개념은 공허하지만 공포를 조장하고 폭도를 진정시키는데 유용한 수단이라고 보았다. 니체는 ‘문제가 되는 것은 신의 죽음이라기보다 인간의 불신’이라고 지적했다.(258) 신이 실재하든지, 하지 않든지 이들에게 있어서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창조한 셈이 된다. 그리고 볼테르는 하인이 자신처럼 신앙심이 없어지지 않을까 두려워했다고 한다. 인간은 신정론과 같은 인지적 충돌로 인해서 신앙심이 옅어지기도 하면서 신을 죽였다가 살렸다가를 반복한다. 무신론은 신을 죽이려다가도 신이 가지고 있는 도덕의 기초로서의 절대성 때문에, 자본주의사회에서 종교적 믿음이 선한 영향력을 미침으로 과도한 경쟁에 내몰리지 않는 선한 구조를 만들기도 하기 때문에 머뭇거린다. 

  그렇다면 종교가 만일 그 역할을 사회질서의 토대에서 벗어나는 날이 온다면 이 세계는 어떻게 될까? 이글턴은 만일 그런 때가 온다면 자유로워진 종교적 믿음은 정치의 비판자로서 지정한 목적을 자유롭게 재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259) 여기에서 말하는 진정한 목적이란 다분히 마르크스적인 전망이다. 정치가 인간사회에서 인간을 소외시키지 않고, 도리어 그 행복하게 살게 하는 도구가 되기 위해서는 종교적 믿음, 즉 ‘신은 이렇게 이야기 하신다.’라고 하는 믿음이 큰 토대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신은 구약에서 설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참신인 하나님이 아니라,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벌을 내리는 하나님도 아니다. 신약에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인간으로 내려온 예수를 가차없이 죽이는 신도 아니다. 예수처럼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과 연대하고 그 자리에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포교활동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서 종교적 믿음을 ‘사랑’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바로 이글턴이 말하는 ‘진정한 목적’과 맞닿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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