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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Check/철학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의 「배제와 포용」(Exclusion and Embarace)

by 스파르탄 2021.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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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제의 평범성과 포용의 비현실성

: 미로슬라브 볼프의 포용에 대한 비판

 

 

 

 내가 7년 동안 몸 담았던 학교에는 단 하나의 풋살(축구와 같은 룰이지만 5:5의 소규모 인원이 하는 경기)을 할 수 있는 경기장이 있다. 10명이 있을 때에는 5:5의 경기이기 때문에 실력이 좋건, 나와 인간관계가 되어 있든지, 인성이 어떻든지의 판단을 일단 유보하고 함께 경기를 한다. 그러다가 10명 이상이 되면 그 자리에서 이른바 배제와 포용이 일어난다. 나와 실력이 다르기 때문에, 저 사람은 공을 너무 오래 끌고 있기 때문에, 팀워크를 해치기 때문에, 등등의 판단의 근거를 가지고 그 풋살장이라는 공간 안에서 팀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도 포용이 일어난다. 나보다 못한 실력을 가졌기 때문에, 공을 오래 끌고 있기 때문에, 팀워크를 해치기 때문에 타자로 버림받은 자를 다시 팀 안으로 불러들인다. 이 곳에는 자유와 사랑이 공존한다. 타자로 내어 쫓을 자유, 타자를 다시 불러들이는 사랑이 있다.    

  자유로 결탁한 5명의 팀원은 무수히 많은 승리를 타자로 결성된 팀으로부터 거둔다. 많은 시간 그 풋살하는 장소 안에서 군림하며 자신들의 승리에 도취되어 타자들의 자리할 곳 없음을 돌아보지 않는다. 그 때, 나는 배제와 포용 중에 어떤 선택을 했었는가? 자유롭게 배제를 택한 적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랑으로 포용을 선택한 적도 있었다.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 가 쓴 「배제와 포용」(Exclusion and Embarace)의 서론과 1장을 읽고 난 후에 나는 거의 5년간 매주 가서 즐겁고, 행복하게 공을 찼던 그 장소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나의 즐거움과 행복도 결국, 타자화된 자들을 이김으로써 완성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자전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이유 또한 볼프를 정체성으로 받아들인 까닭이다. 볼프는 서론에서 자신의 이 ‘보고서’는 대단히 개인적인 성격을 띈다고 보는데, 단순한 감정적인 감상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의 핵심을 건드리는 문제를 지적으로 파헤쳐보려는 시도였다고 한다.(14)   

  볼프의 처참하게 짖밟혔던 ‘그 곳’에서 세계시민이자 그리스도인으로서 경험을 겪은 그 정체성으로 녹여낸 이 책을 읽음으로서 나의 ‘이 곳’에서 들었던 물음에 그 정체성이 입혀졌다. 그 당시에는 볼프의 정체성을 만나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그저 ‘치사한 놈들’, ‘불쌍한 놈들’이라는 단순하고 원초적인 언어로 표현할 뿐이었다. 분하면 욕하고, 불쌍하면 욕하는 욕만 하던 지난 과거에서 현재 이 곳에서 볼프의 배제와 포용에 빗대어 나의 삶을 이론적으로 들여다보고자 한다. 내가 겪었던 사건이 볼프의 경험보다 처참하거나 세계적으로 문제시되는 문제는 아닐지라도 말이다.

  배제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항상 일어나고 있다. 볼프가 말한대로, 배제와 포용은 ‘저 곳’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이 곳’에서 우리가 경험하고 있으며, ‘저 때’라는 과거에만 있던 것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91) 볼프는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배제라는 행위에 대해서 배제를 두 가지로 규정한다. 

 

첫째, 배제는 연결된 이음새를 잘라냄으로써 스스로 상호 의존의 형식을 벗어나 극단적인 독립의 위치를 차지려는 태도를 수반한다.

둘째, 배제는 분리를 지워버리는 것을 수반한다. 그리하여 타자는 타자성을 유지한 채 상호 의존의 형식에 속해 있는 존재로 인식되지 않는다.(101)  

    

  배제는 타인의 정체성과 자신의 정체성이 맺고 있는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는 상호 보완의 이음매를 단절시키는 행위이다.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는 선택에서 더 나아가 주체로서 다른 주체를 받아들이지 않는 배제에 이르는 것이다. 이러한 극단적인 독립의 위치를 차지하려는 데에는 목적이 있는데, 이 주체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고 할 때, 자신과 동일한 부분의 정체성을 가진 주체들과 결합한다. 이 독단적인 주체의 모임은 결국, 두 번째 배제의 성질을 갖게 되는데, 타자의 타자성을 인정하지 않고, 나와 분리된 주체로서 대하지 않는다. 상호 의존의 관계가 없기 때문에 타자는 착취해도 되고, 폭력을 휘둘러서 이익을 얻어낼 수 있는 열등한 존재로 취급한다. 이 열등한 존재에게 배재하는 주체들은 자기들과 동일하게 되어야 하는 목표점을 제시하고 자신들과 동일성을 띄지 않으면 안 되는 타자로 단숨에 그 주체의 인간으로서 지니는 가치를 자신들의 기준으로 폄하한다. 

  이 배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배제하게 하는 사회적 구조를 바꾸는 방법과 볼프가 주장하는 배제하지 않고 타자와 조화롭게 살아가는 주체가 되는 방법(30)이 있다. 볼프는 배제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포용하는 주체들이 이 사회에서 많아져서 이 각 주체들이 사회적인 분위기를 바꿔나갈 때 가능하다고 본다.(31) 이 이야기에 동의할 수 없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포용하는 주체의 모델로 제시한 볼프의 예에 대한 다른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볼프는 예수 그리스도가 죽었던 것은, 악한 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선하다고 하는 기준, 규범, 원칙들을 가지고 있었던 자들이 자신들과 다른 상위의 가치를 보여준 예수가 틀렸다고 생각했기에 죽었다고 설명한다. 자신들이 지닌 선한 가치를 훼방하는 예수는 죽어 마땅한 자이기 때문에 그 주체들이 결집하여 예수를 죽인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마저도 죽이는 그 주체들에 맞서서 포용하려는 자들은 죽거나 고통당할 수밖에 없다. 볼프는 사랑은 고통을 수반한다고 말한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는 자신의 신체적 고통보다 하나님과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했던 제자들에게 버림받음으로 고통스러워했다. 그 고통의 순간에서 ‘저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용서해주세요.’라고 말할 수 있어야만, 피해를 입은 자가 가해를 한 사람을 위해 대신 용서를 빌어주는 일이 현실에서 절대 다수가 하게 하는 일이 가능한가? 나는 가능하지 않다고 본다. 

  볼프는 ‘어느 누구도 포용하고자 하는 의지로부터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전제를 가지고 화해에 나서야 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악한 타자가 나에게 와서 폭력을 행사하고, 겁박하고, 때려도 포용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대해야 한다는 말과 같다. 이와 같은 타자와의 관계맺기는 데리다의 ‘무조건적 환대’와 같다. 자신의 집에 어떤 손님이(라틴어로 손님과 약탈자는 같은 단어이다) 찾아오든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임’이 바로 볼프가 말하는 포용하고자 하는 의지인 것이다. 타자가 손님인지, 약탈자인지 모를 위험성 앞에서 무조건적인 환대, 즉, 포용을 하라는 입장에는 찬성하기 힘들다. 강자의 입장에서는 가능한 이야기이다. 손님은 환대하고, 약탈하러 온 자에게는 그 약탈을 멈출 만한 힘이 있거나 재력이 있는 자는 포용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제지력이 없는 약자들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로 들릴 것이다. 

  물론, 볼프는 포용의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가 죄로 남을 괴롭히는 이들과 억압당한 희생자들에게도 회개하라고 했음을 든다.(179) 억압당한 희생자들에게 있는 충분히 이해가 가능하지만 그럼에도 비인간적인, 증오로부터 해방될 필요도 있기 때문인가?(180) 볼프는 바우만의 말을 인용한다.

 

시기의 가장 중요한 영향력은… ‘지배자들의 사상’을 ‘지배적인 사상’으로 바꾸어 놓는다는 점이다. 일단 특권적인 지위와 특정 가치 사이의 연관성이 사회적으로 구축되고 나면, 특권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암묵적인 부추김을 받아 자신들도 그런 가치를 요구함으로써 자신이 당하는 모욕에 대해 보상받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런 가치의 유혹하는 힘은 더욱 강화된다. 

 

  볼프에게서 나타나는 포용의 문제점은 이와 같은 지배적인 사상으로 도약하려는 지배자들의 사상을 막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착취하는 지배자들의 사상을 통제하거나 비판, 혹은 혁명을 통해 뒤바꾸려고 시도하기보다 억압받는 자 또한 잠재적인 지배자일 뿐이라는 논리에 있다. 폭력을 당한 자가 가지고 있는 적대감이 또 다른 폭력을 불러올 것이라는, 잠재적인 범죄자로 억압당한 자를 몰지만, 그 억압당한 자가 폭력을 행사하는 자로 되는 연쇄를 끊는 방법을 현재 이 곳에서 억압받는 당사자에게 말하기는 어렵다. 서론에서 볼프가 말하였던 것처럼 이는 개인적인 감상이 아니라, 지적인 탐구였기에 가능한 논리이다. 개인적인 감상이나 느낌이었다면 위와 같은 논리는 펴지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볼프는 또한, 아렌트가 말하는 ‘악행의 연쇄’(190)을 끊을 수 있는 방법에서 결코 용서를 구하지 않는 원수에 대한 용서를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용서를 하는 주체는 당연히 악행을 당한 피해자이다. 그리고 볼프는 더 나아가 용서를 구하는 자보다 용서를 구하지 않는 자가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바울이 이야기한 나의 자아의 중심 밖으로 탈중심화하여 그 사람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요구는 마치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과 피해자를 동일시함과 같다. 아무런 죄 없이, 잘못이 없이 자신의 생명을 해쳐서 이익을 보려고 다가오는 원수를 용서하라는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고 있다. 만약 희생양이 자신의 목줄을 끊을 수만 있다면 바로 그 자리에서 도망쳤을 것이다. 

  이처럼 볼프는 1장에서 포용은 억압당하는 자에게 억압하는 자를 포용하라는 비현실적인 수단으로 평범하게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배제를 없앨 수 있다고 말한다. 볼프의 지적인 탐구 앞에서 어떤 감정적인 분노가 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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