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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Check/문학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

by 스파르탄 2021.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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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할머니의 연세는 올해 아흔여덟이다. 매번 뵐 때마다 ‘늙으면 죽어야지’라는 말을 하신다. 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중3때까지 할머니는 항상 늙으면 죽어야 한다고, 죽어서 천국에 가야지 여기에서 뭐하러 더 살겠냐고 내게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할머니의 신앙심이 매우 뛰어나시고, 이 세계에 대해 아무런 미련이 없으신 초월한 한 인간으로 존경했다. 비록, 글줄은 그 당시에 배우지 못해서 읽지 못하셨어도 이 신앙만으로도 할머니는 나의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와 함께 교회에 갔다. 매번 다른 자리에 앉다가 할머니 곁에 가서 할머니의 기도소리를 처음으로 들었다. 내게는 그 기도소리가 큰 충격이었다. 할머니는 ‘하나님 아버지, 오래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고 계셨다. 할머니는 신앙이 없는 것인가? 할머니의 세계는 이 곳보다 저 곳이 더 중요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할머니는 실존을 지향했다. 뮈르소와 아브라함이 빠져나갈 길 없는 세계에서, 신앙에서 죽음으로, 혹은 내세로 어디에도 한눈을 팔지 않고 부조리와 역설의 사이에서 살았던 것처럼 할머니는 이 세계에서 실존하려고 발버둥치고 있었다. 천국에 가면 돈은 다 쓸데가 없다고 하시면서 등이 굽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지락을 캐고, 밭을 일구고, 젓갈을 담아 파셨다.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데에는 쓸데가 없지 않은 것들을 열정을 가지고 캐내셨다. 우리 할머니는 확실히 교회에서 이방인이었다. 입으로는 교리를 고백하지만 그 속은 이 세계에서 실존하기를 원했다. 할머니는 알베르 카뮈의 뮈르소와 쇠렌 키에르케고르의 아브라함과 같이 실존하기를 원했다. 이 둘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첫 번째 공통점 : 이방인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인 뮈르소와 아브라함은 공통점이 많다. 뮈르소는 프랑스인이지만 알제리의 알제로 이주한 이방인이고,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믿음으로써 조상의 땅에서 약속의 땅으로 이주한 이방인이었다. 두 사람 모두, 죽음 이후의 내세에 있는 축복이나 어떤 구원, 보상에 기대어서 현재 세계를 살아가지 않았다. 또한, 두 사람 모두 우리가 보편적으로 인식하는 윤리적인 삶을 살지 않았다. 뮈르소는 어머니가 죽었을 때 슬퍼하지 않았고, 연인 마리와 코미디 영화를 보고 격정적인 사랑을(뮈르소의 입장에서는 사랑이 아니라 확실한 몸의 결합을) 나누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으로 이주하는 내내 자신의 아내인 사라를 누이라고 소개하여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적들로부터 아내를 방패삼아 살았다.

 

두 번째 공통점 : 세계와 신앙

 

  가장 중요한 공통점은 세계를 바라보는 시야에 있다. 뮈르소는 작중에서 간호사의 말과 감옥에 갇힌 상황에서 공통의 말을 내뱉는데, ‘정말 빠져나갈 길이 없다’라고 말한다. 뮈르소에게 있어 세계는 빠져나갈 수 없이 꽉 막혀있는 부조리의 세계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역설이다. 하느님이 자신의 아들인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는 말에 아브라함은 존속 살해라는 가장 비윤리적인 행위를 미수에 그침으로,(만약 하느님의 천사가 말리지 않았다면 그대로 살해는 일어났을 것이다) 하느님이 기뻐하는 성스러운 행위로 그 위상이 급격히 변한다. 

 

세 번째 공통점 : 부조리와 역설

 

  아브라함과 뮈르소는 이렇듯 보편적인 윤리에서 상당히 벗어나 세계에서 ‘실존’이 어떠한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들의 실존은 어찌할 수 없는 부조리와 역설의 실존을 살았다. 만약, 아브라함이 이사악 대신에 바쳐질 제물이 넝쿨에 뿔이 걸려 있는 광경을 흘끗 보고서, 자신의 아들인 이사악을 죽이는 ‘척’만 했다면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는 영광을 획득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인신공양을 했던 이교도인들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이방인이면서 자기 자식을 스스로 죽인 아비는 사회에서도 매장당했을 것이다. 그러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살인자에서 가장 존귀한 자가 되는 역설이 일어났다. 가장 낮은 지옥같은 고통으로 떨어지던 아브라함이 천국과 같은 기쁨으로 돌아섰다. 아브라함 밖에 할 수 없는 이 종교적 실존 앞에서 우리들은 두려움으로 떨 수밖에 없다.

  뮈르소는 어떠한가? 만약, 뮈르소가 부조리에 빠진 자신을 내세를 믿는다고 시인하기만 한다면 뮈르소는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실존할 수 있는 세계에서 있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뮈르소는 내세를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파리에 가라고 하는 사장의 말에 알제에 있는 것이 좋다고 말하는 것처럼, 내세보다 현세가 좋다고 말한다. 내세의 믿음과 결부되어 있는 죄에 대한 고백도 따라서 하지 않는다. 

  이 둘은 왜 부조리와 역설의 사이에서 타협하여 내세로 한눈을 팔지 않았을까? 아브라함은 들어올린 칼을 스스로 거둬들이지 않았다. 이사악이 죽어서 내세에 천국에서 볼 수 있다는 그런 생각도 없었다. 단지 신의 실존에 대한 ‘물음’으로 생각하고 단호하게 칼을 치켜들었다. 뮈르소 또한 자신을 이사악처럼 내세를 믿으면 현세의 실존이 무너지기 때문에 죽음을 맞는다.

  

  할머니, 뮈르소, 아브라함은 공통점이 많다. 우선 첫 번째로, 할머니는 다른 섬에서 시집온 이방인이었으며, 뮈르소 또한 프랑스 본토에서 알제로 이주하였고, 아브라함 또한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약속의 땅으로 이주한 이방인이었다. 할머니는 교회 안에서 거의 유일하게 내세를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두 번쨰로, 이들이 사는 세계와 신앙은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상황으로 항상 이들을 인도한다. 세 번째로, 그 상황들이 바로 부조리이며 역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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