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케로의 선(善)과 ‘마태복음 20:1-16’의 선(先) 이해
: 코로나19 사태에서 시민과 국가의 의무를 예로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19 확진자가 600만명을 초과했다.(2020.05.30. 기준) 대한민국 또한 코로나19가 이태원 클럽 방문자들을 중심으로 다시금 확산되고 있는 추세이다. 코로나19가 종식되어 가고 있는 줄 알았던 이들은 비난의 여론을 이태원 클럽 방문자들에게 돌렸다. “시국이 어느 땐데 그런데를 가느냐.”는 식의 비난이 가장 많았다. 그렇다. 이들은 시민으로서 국가 구성원으로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타인과 관계하는 자로서 지켜야할 의무를 저버렸다는 것이다. 코로나19의 위험성을 알고도 자기의 유익함 즉, 쾌락을 좇았다는 사실에 수많은 이들의 공분을 사게 했다.
이러한 공분을 일으키는 근저에는 현대를 살아가는 한 개인이 가져야만 한다는 ‘의무’에 대한 이해와 느낌이 공유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시민으로서 개인이 가져야할 의무는 서구 민주주의의 영향이 크다. 그 의무론의 원류를 따라가 보면 로마시대의 키케로의 『의무론』에 그 사상적 배경을 두고 있다. 키케로는 의무론에서 개개의 시민이 행하는 모든 행위의 정당성을 타인과 사회 더 나아가 국가와의 관계에서 찾아야 함을 주장했다. 총 세권에서 선을 행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선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그 선은 지혜, 정의, 용기, 절제로 성취된다고 보았다. 그에게 선이라 함은 항상 지혜를 구하고 그 지혜로부터 도출된 정의를 수호하며, 정의를 집행할 때 망설임 없는 용기를 내어야 하고 마지막으로 용기가 만용이 되지 않도록 자기를 절제함으로 실현되는 것이었다.
물론, 개개인의 쾌락추구, 달리 말하면 유익함을 추구하는 것을 금지하지는 않는다. 다만, 개개인의 유익함에 대한 개념을 바꾸어 놓는다. 단순히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개인에게 유익한 것이 아니라, 선을 추구함(의무)이 개인에게도 유익이라는 것이다. 그 당시의 사람들, 혹은 현대의 사람들은 개인의 쾌락 추구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안 된다는 기본전제를 가지고 있다. 다만, 그 쾌락이 자기파괴적 혹은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이라면 키케로는 그것은 선하지 않고, 선하지 않은 것은 유익한 행위가 아니라고 인식을 바꾸어 놓는다. 유익하진 않으나 선할 수 있고, 유익하지만 선하지 않을 수 있다는 반론도 제기될 수 있다. 키케로는 여기에서 “한 개인으로서”를 강조하며 논박한다. 한 개인으로서 유익한 것이 공동체에게 있어서 선하지 않은 것이라면 그것은 진정으로 유익한 것이 아니다. 또한 공동체에게 있어서 유익한 것이 한 개인에게 선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유익함이란 개인의 차원보다 관계적 차원에서 선함과 등가를 이뤄야만 한다는 것이 키케로가 제시한 시민으로서의 의무였다.
그렇다면 각 시민이 국가의 지침대로 마스크를 착용하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면서 공동체의 유익함=선을 추구하는 것이 국가와 공동체에 대한 의무라 한다면 국가는 어떤 의무를 갖는가? 이 또한 코로나19 사태로 미루어 이야기해볼 수 있다. 코로나19의 전세계적인 유행에 따라서 한국 경제도 전례없는 불황을 겪었다. 소비심리가 크게 위축되고, 사회적으로 취약한 계층들은 더욱 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다. 따라서 정부는 긴급재난지원금을 전국민 대상 가구에게 제공했다. 국가의 선은 선을 지키는 시민에게 그 의무를 지켜나갈 수 있는 안전망을 제공하는 일이다.
그러나 긴급재난지원금에 대해서 포퓰리즘이나 요샛말로 위기 시에도 개개인이 노-오-력으로 극복해야 하는데, 세금낭비라는 이야기도 있다. 한 마디로 불공평하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자신이 낸 세금과 사회 취약계층이 낸 세금의 양이 다른데, 국가가 제공하는 서비스는 오히려 취약계층에게 제공되는 것이 많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세금을 낸 만큼, 혹은 부유한 만큼 국가가 더 많은 혜택을 주는 나라가 이상적인 민주주의 국가일까?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이상적인 나라는 천국을 닮은 나라이다. 가장 신뢰할 만한 고전으로 복음서에서 드러난 천국은 어떤 곳인가. 바로 선하기 때문에 악하다고 손가락질 받는 나라이다.
마태복음 20장 1절부터 16절까지 포도원 주인의 비유가 나온다. 이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은 포도를 수확하기 위해서 이른 아침, 오전 아홉시, 열두시, 세시, 다섯시까지 총 5회에 걸쳐서 일꾼들을 시장에서 일꾼으로 데려온다. 첫 번째로 불러온 사람들에게는 하루 품삯으로 한 드라크마를 준다고 약속했다. 두 번째로 포도원 주인이 장터로 나가자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어서 그들에게 상당하게 주리라고 하고는 포도원으로 들여보냈다. 마지막으로 5시에 들여보낸 이들은 아무도 그들을 품꾼으로 쓰는 사람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일꾼으로 쓰기 적합하지 않은 이들임에도 불구하고 주인은 그들을 모두 포도원으로 불러들인다.
날이 저물자, 일이 모두 끝나고 주인은 품꾼들에게 삯을 주려고 하는데, 마지막 오후 5시에 온 사람들부터 주었다. 한 데나리온씩 받으니 이른 아침에 온 사람들은 술렁일 수밖에 없었다. 한 시간정도 일한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하루 품삯)을 주니 자신들은 산술적으로 9배정도는 받을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포도원에서 일한 기여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른 아침에 온 삯꾼들 또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이들은 주인을 원망했다.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들과 하루 종일 일하며 견딘 수고를 같게 취급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인은 삯꾼에게 자신은 아무 잘못이 없다고 말한다. 한 데나리온 주기로 했고, 그 약속을 지킨 것이고, 똑같이 한 데나리온 주는 것은 자기의 뜻이라고 말한다. 주인은 자기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고 반문한다.
일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하루 종일 일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합리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다. 자신이 9배의 시간을 더 일하고 같은 금액의 돈을 갖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주인에게 원망했던 것은 일순 당연한 듯 보인다. 그러나 포도원 주인은 시장에서 일이 없어서 불안함이 극에 달았을 사람들을 생각했다.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마20:7)이라는 말은 자기 결정으로 일하지 않았던 이들이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품을 팔 곳이 없었기 때문에 일을 구하기 위해 시장에서 계속 불안과 싸우며 서성였던 것이다. 주인은 이들에게 먼저 온 사람보다 먼저 삯을 주었던 것 또한 그들의 불안을 하루속히 지워주고자 했던 주인의 뜻이었다.
“나중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되리라”(마20:16)은 이미 일하고 있는 자들을 두렵게 만드는 말이 아니라 나중된 자를 먼저 위하는 의미로 읽혀야 하지 않을까. 거지 나사로가 천국에서는 배불리 먹고,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는 이유는 위로를 먼저 받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이번 긴급재난지원금이 저소득층과 소외계층 280만 가구에게 ‘먼저, 현금’으로 지원된 것은 천국을 닮은 국가의 의무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국가의 선(善)은 먼저 선(先)이다. 시민 중 누구에게 가장 먼저 유익해야 할 것인가를 판단하고(지혜), 그 지혜로부터 도출된 정의를 악이라고 이야기할 지라도 망설임 없는 용기로 정책을 실현해야 한다. 물론, 정책을 실행한 뒤에는 반드시 절제함으로 정책에 대한 평가를 받아들여서 더 나은 국가로 나아가야 한다. 시민이 시민의 선(善)을 이행하고, 국가는 국가의 선(先)을 수행한다면 저곳만이 아니라 이곳에 천국이 임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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