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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에세이

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

by 스파르탄 2021.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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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이라고 되뇌기만 해도 두렵다. 

 

죽음이 삶의 끝이고 그 끝이 온다는 생각만으로 몸이 굳는다. 

 

몸이 굳으면 죽음을 직감할 때이다.

 

범이 가만히 으르렁 거리는 소리에 사냥개의 몸이 굳는 이유는 

 

죽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죽음이 두렵다고 사고하기 이전에 몸은

 

그 앞에 굳는다.  

 

그래서 예부터 조선땅에서 호환은 마마와 동급의 죽음을 의미하지 않았나. 

 

이렇듯 죽음, 이라고 느끼기만 해도 몸은 즉각적으로 굳어지는데, 

 

왜 중세의 누군가는 죽음을 항상 기억(상기)하라고 얘기했을까.

 

이 말은 중세의 화려한 암흑을 뚫고 현재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있을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삶을 치열하고 충실하게 살게 할 원동력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죽음이라는 셔터문이 닫히기 전에 치열하게 달려와서 그 밑으로 슬라이딩하듯이. 

 

셔터문이 내려가고, 뒤에는 폭발이 뒷목까지 열기가 얼얼할 때 

 

그 밑까지 미친듯이 달려가는 것이 곧 삶이라 이해한 까닭이다. 

 

그런데 과연 중세의 누군가부터 현대의 누구까지 믿은 것 처럼

 

죽음만 기억한다면 치열한 삶을 살 수 있을까? 

 

내 경우에는 조금 다르다. 죽음이 당장 닥쳐오면, 

 

앞서 말한 범 앞의 강아지처럼 그 자리에 얼어붙을 것 같다. 

 

셔터문으로 뛸 준비도 못 하고 '어..'하다가 재로 돌아갈 것 같다.

 

치열하게 아무것도 안 하는 허무주의에 쏘옥 하고 빠져버릴 것 같다. 

 

"치열하게 살아봤자 뭐해, 죽으면 아무 소용도 없는데." 

 

그래서 나는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는 해석을 하기로 했다. 

 

죽음을 안락한 침대에 누워 매일 맞이하는 잠이라고. 

 

죽음을 억지로 기억할 필요도 없이, 나는 죽음을 청하고

 

죽음은 하루의 셔터를 내려주는 고마운 휴식이라고. 

 

이름만 다를 뿐, 잠은 매일 맞이하는 죽음, 혹은 그 연습이다.

 

잠은 몸의 경직이라기보다 동공이 풀리듯 몸이 풀어지는 이완이다. 

 

죽음은 잠보다 조금 더 나아간, 몸의 '한없는' 이완일 뿐이고. 

 

풀린 동공이 다시 조여지지 않는 완전한 이완.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 원인이고, 삶을 치열하게 한다는 결론 사이에서

 

죽음의 엄정함, 단두대, 호랑이, 재앙과 같은 의미는 이제 이완되어 버렸다. 

 

죽음은 좀 더 깊이 한없이 이완된 상태이고, 다시는 그 이완에서 힘을 줘서 박차고 일어날 수 없는 것일 뿐.

 

우리는 매일 잠이라는 이완을 통해서 죽음을 연습하고 있는 셈이니 

 

충분히 본무대에서 잘 죽을 수(Well-Dying) 있다. 수도 없이 연습했으므로.  

 

죽음이 뒷덜미를 소름끼치게 핥고 지나가는 사신의 낫이 아니라 

 

뒷덜미에 베는 포근한 배게요, 안식의 때라는 걸 알기로 했다. 

 

안식, 이완, 포근한 죽음에 두려울 게 없다.

 

죽음을 두려워 하는 감정으로 치열한 삶을 살아내는 동력을 삼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죽음을 청하는 마음으로 사는 편에 서겠다.  

 

(두려운) 죽음을 기억하기보다

 

(포근한) 죽음을 매번 연습하며 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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