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작가가 말했다. 아니 썼다. 그리고 나는 그걸 읽었다.
글쓰는 데 자신이 있진 않지만, 그 글을 쓰는 나에 대해 자신있기 때문에
계속 절필하지 않고 몇십년째 쓰고 있는 것 같다고.
몇십년째 계속 쓰다보니 몇십년째 쓰고 있는 나 자신이 축적되어서
더 자신감있게 글을 세상에 토해내고 있다고 그 작가는 말했다.
자기를 신용하는 감각, 자신감은 내 생각에 견뎌낸 고통과 즐겨온 시간의 곱인 듯하다.
현대의 노트북을 몇 대를 갈았고, 키보드를 몇십대를 고장내고, 건초염을 달고 사는 작가.
할 수 있을까 만을 생각하고, 머뭇거리다가 타자기에 손도 못 대고 글을 쓸 의지마저
어디로 부는지 모르는 바람에 날려보낸 사람과
불안한 마음을 이리저리 불도록 놓아두고, 일단 설계도 없이 무작정 지붕부터 올리려는
무모한 사람. 둘 중에 고통을 견디고, 즐겨온 시간을 축적하는 것은 후자일 것이다.
글을 쓰는 나를 축적해온 그 세월만큼, 자기를 신용하는 감각은 굳어져서 무른 찰흙같았다가
두툼하고 단단한 차돌이 된다.
누가 날 알아봐주지 않으면 안달나는 불안들, 이러다가 망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온한 생각들이
심장보다 한뼘 아래 부근을 뜨끔- 하게 한다. 때때로.
그때마다 이미 시작된 인생 자체가 고통의 연속이고, 선택했으면 그 선택에 투신하는 것만이
답임을 스스로 새긴다.
만약- 이라는 말로 되뇌이는 실체없는 고통에 빠지지 않으려면,
내 신체로 묵묵히 선택한 길을 두드리고 다지며 나아가는 수밖에.
수없이 나를 붙잡아 세우려는 이미 닫힌 가능성들에,
이랬다면 저랬을까, 저랬다면 이랬을까 라는 망상에,
생각만 하다가, 우물쭈물 하다가는
헤엄치지 않는 상어, 지느러미가 잘린 상어처럼
끝없이 그 생각의 심해에 빠져들 뿐이다.
자신감을 갖는다는 건,
맞바람이 아무리 새던 간에
엔진에 불을 붙여 나아가는 고통스런 경험,
순풍에 몸이 어느 순간 붕- 떠서 즐겼던 시간이
주는 선물이다.
그 선물을 스스로에게 주자.